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사를 간 건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가게가 잘 되면서 우리 집은 빠르게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집을 샀다. 사실 ‘이사’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다. 도로 옆 작은 상가들이 늘어선 거리에 아빠의 호프집, 엄마의 식당, 그리고 우리가 이사 간 빨간 벽돌 빌라가 모두 붙어 있었다. 걸어서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고, 대부분의 물건을 버리고 갔기 때문에 짐을 옮길 일도 거의 없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이전 집에서 새집으로 옮겨간 것은 우리 네 가족뿐이었다. 이사를 끝마친 집안은 새 물건들로 반짝반짝 빛났다.
아빠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구를 풀어내듯 집 안을 자신의 취향으로 채웠다. 현관 앞 커다란 수조엔 잉어가 헤엄쳤고, 그 아래에는 거북이, 냉장고 옆에는 말을 따라 한다는 구관조 새장이 놓였다. 안방에는 금붕어 어항과 난초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아빠는 아침마다 부지런히 물고기 밥을 주고 난초 잎사귀를 하나씩 정성스레 닦았다. "잘 먹고 잘 커라."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아빠의 표정은 들뜨고 설레어 보였다. 그런 아빠의 모습은 평소 가게에서 손님들과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아빠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엄마는 집안이 작은 동물원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아빠에게 잔소리를 했지만, 사실 엄마 역시 집안 곳곳을 꾸미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냉장고, TV, 세탁기, 전자레인지, 전축 세트까지 새 가전제품들이 집안에 들어올 때마다 엄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먼지를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고 주방에는 원목 식탁과 의자가, 안방에는 엄마가 고심 끝에 고른 오크나무에 십장생이 새겨진 장롱이 벽을 가득 채웠다. 나와 동생의 방에는 당시 모든 아이의 로망이던 피노키오 책상과 이층 침대가 들어섰다.
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동생을 제치고 재빠르게 이층을 차지했다. 앉으면 머리가 천장에 닿고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게 불편했지만, 어린 나에게는 오히려 그 불편함이 특별했다. 눅눅한 장판 위가 아닌, 폭신하고 보송한 침대에 누워 불을 끄면, 천장에 붙인 야광 별들이 반짝였다. 나는 별이 가득한 우주 속에서 잠이 드는 듯한 행복감에 젖곤 했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가장 좋았던 건 사실 화장실이었다. 발 매트만 한 작은 현관 앞에 서면 정면으로 화장실이 보였고, 욕조도 샤워 부스도 없었지만, 집 안에서 볼일을 보고 씻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더구나,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야 했던 재래식 변기가 아닌, 의자처럼 앉기만 하면 되는 양변기는 내 삶의 질을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집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모습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아빠는 손목에 큼지막한 금색 시계를 차고, 엄마는 반짝이는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로 온몸을 꾸몄다. 동생은 넉넉한 용돈 덕분에 매일 간식을 사 먹으며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랐고, 나는 엄마의 손길로 부잣집 딸처럼 단정하게 꾸며졌다. 매일 머리를 곱게 빗어 큼지막한 큐빅 핀을 꽂고, 비싼 원피스에 하얀 스타킹, 반짝이는 단화를 신고 학교에 갔다. 내 모습을 보고 “우와, 너 진짜 공주 같다!”라며 칭찬해 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늘 치마만 입고 다닌 탓에 장난기 많은 아이들에게 '아이스케키'의 표적이 되어 짜증이 나기도 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엄마는 자식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책장에는 전집이 가득 꽂혔고, 나와 동생은 태권도, 피아노, 미술, 주산 등 빼곡한 스케줄에 따라 매일 학원을 오갔다. 엄마는 학원비를 아끼지 않았고, 성적표나 상장은 액자에 끼워 거실에 걸어둘 정도로 자랑스러워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엄마는 ‘치맛바람 휘날리는 학부모’였다.
“내가 너는 진짜 엄청~ 신경 써가며 키웠어. 너 학교 다닐 때 창가에 앉은 적 있어? 없지? 맨날 가운데 앞자리였지? 그거 다 엄마가 선생님한테 촌지 준 덕분이야~ 그래서 소풍 때 담임 선생님께서 너랑 단둘이 사진도 찍어줬잖아. 반 애들 다 그렇게 해주는 거 아니거든. 받은 게 있으니까 특별대우해 준 거지.”
그 말을 하는 엄마는 어딘가 뿌듯해 보였지만, 나는 고맙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앨범 안 사진 속에서 나를 다정하게 감싸안으며 웃고 있던 선생님은,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분이었다. 말도 조곤조곤 따뜻하게 하시고, 상냥하게 웃어주시던 모습이 정말 좋았다. 나는 진심으로 선생님이 나를 예뻐해 준다고 믿었고, 그 마음이 좋아서 수업도 더 열심히 들었다. 그런데 그 모든 특별한 순간이 ‘촌지’ 때문이었다니. 선생님이 진짜 나를 좋아한 게 아니라, 엄마가 준 봉투 속 돈이 좋아서 그런 거였다면?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실망감이 밀려왔다. 선생님과의 따뜻한 기억이 하루아침에 상한 우유처럼 시큼하게 변질된 기분이었다. 좋아했던 만큼 마음도 더 무거웠다.
집안 사정이 좋아져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였을까. 매일같이 일을 나가던 부모님은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일주일에 한번 가게를 쉬셨다. 가게 문을 닫는 날이면 가족 다 같이 놀이공원에 가기도 하고 여름이면 바닷가나 계곡으로 더위를 피해 나들이를 갔다. 부모님이 집에 계시는 날에는 우리 집 현관문은 늘 열려 있었는데 동네 사랑방처럼 윗집 아주머니가 들어와 커피를 마시고 가고, 옆집 아저씨는 소주 한 병을 들고 와 아빠와 술을 나눠 마셨다. 어떤 날은 지르박 선생님까지 초대해서,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에 맞춰 다 같이 춤판을 벌였다. 마치 잔칫집 같았다.
나는 작은방에서 동생과 종이 인형 놀이를 하다가 문틈으로 그 낯선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안방부터 거실까지 가득 찬 사람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신이나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고 서로 손을 맞잡고 깔깔거리며 춤을 추는 아빠, 엄마의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도 환해 보였다. 그 모습이 나는 참 좋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부모님의 얼굴은,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행복하고 여유롭던 나날들은 불과 몇 년 만에 꿈처럼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