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제일 돈 많은 아이

by 앙또아


1980년대, 그 시절 대부분의 가게 뒤편에는 작은 쪽방이 하나씩 딸려 있었다. 우리 가족도 식당 뒤 작은 쪽방에 살았는데, 네 명이 나란히 누우면 빈틈 하나 없이 꽉 차는 그런 공간이었다.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엔 시간이 만든 얼룩이 선명했고, 대충 깔아 놓은 낡은 장판은 누렇게 변색된 테이프로 여기저기 덧붙여져 있었다. 가구라고는 수납장과 서랍장, 오래된 텔레비전이 전부였던 그 방에서 나는 바닥에 엎드려, 뜯어낸 달력 뒷장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온 신경을 그림에 쏟아붓지만, 장판 위를 스치는 팔에 테이프가 들러붙는 감촉은 늘 짜증을 유발했다.


그림에 지칠 때면 방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라고 외쳐 보았지만 식당 안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내 목소리는 금방 묻혀버렸다. 바삐 오가는 엄마의 뒷모습, 그리고 그 등에 포대기로 업혀있는 눈망울이 또렷한 아기가 보였다. 내 동생이었다. 엄마는 식당을 하면서 둘째를 낳았다. 손 하나 쉴 틈 없는 하루하루, 갓난아기를 돌볼 여유가 없어 평소에는 이웃집에 맡겼고, 사정이 여의치 않은 날엔 아기를 등에 업고 일하셨다. 다행히도 동생은 신기할 만큼 순한 아기였다고 한다.


동생이 조금 자라자, 우리는 함께 쪽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서랍장 위에 층층이 쌓인 이불을 끌어내 바닥에 깔고, 서랍장 손잡이를 발판 삼아 딛고 올라가 뛰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어른들의 눈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 놀이가 우리는 그렇게도 신이 났다. 놀이가 끝나면 이불은 방 한쪽 구석에 산처럼 쌓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엄마는 처음에는 화를 내며 정리했지만, 날마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부터는 그대로 두셨다.


쪽방은 이불을 깔면 네 가족이 함께 잠드는 침실이 되고, 이불을 개어 서랍장 위에 쌓아두면 나와 동생의 놀이터가, 알루미늄으로 된 접이식 원형 테이블을 펴면 밥을 먹는 주방으로 변했다. 하지만 만능인 듯한 그 쪽방에도 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화장실이 밖에 있다는 것이다.


화장실은 방문을 열고 나와 식당 주방을 지나쳐 건물 밖으로 나가야 있었다. 아직 어린 나와 동생은 밤에 혼자 화장실을 가는 것은 무리였다. 멀기도 했지만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식당 안 모습은 음산했고 건물 밖은 캄캄했다. 우리는 자꾸 참고 버티다가 밤마다 이불에 지도를 그렸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방문 옆에는 요강이 생겼다.


식당 안에는 씻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화장실 옆 건물 외벽에 찬물만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늘 빨간 대야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여름엔 줄줄 흐르는 땀에 더위도 식힐 겸 매일 씻었지만, 추운 겨울에는 수도꼭지가 얼어 물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주방에서 끓인 물을 빨간 대야에 부어주면 찬물을 섞어 후다닥 씻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일주일의 묵은 때는 일요일에 목욕탕에 가 벗겨냈다. 쉬는 날도 없이 일했던 엄마는 점심 장사를 위해 꼭두새벽부터 우리를 깨웠다. 나와 동생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비틀비틀 걸으며 목욕탕으로 향했다. 깔끔한 성격이었던 엄마는 피부가 벌게져 따가워질 때까지 때를 박박 밀었다. 인생에서 처음 겪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었지만 목욕을 끝낸 후 마시는 딸기우유의 달콤한 맛에 툴툴거리면서도 매주 엄마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쪽방에는 또 하나의 숨은 공간, 다락방이 있었다. 방 한쪽 구석의 낮은 문을 열면 좁은 계단이 나왔고, 그 끝에는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다락이 있었다. 그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고,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거미줄이 어우러져 묘한 공포감을 자아냈다. 귀신이나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아 나는 그곳을 거의 가지 않았다. 그래도 다락방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 공간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살림살이에 파묻혀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n03.jpg 엄마의 식당 앞에서 찍은 어릴 적 내 사진. 아마도 식당을 열고 얼마 안 돼서 찍은 듯하다.
n02.jpg 왼쪽 위에 살짝 보이는 문이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작은 문이다. 오른쪽 방문 뒤로는 서랍장과 텔레비전이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이 동네가 첫 장사의 무대였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돈이 몰아치는 시기가 온다고들 하는데, 그 말이 맞았다. 우리 가족의 황금기는 바로 그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가게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엄마의 식당도, 아빠의 호프집도 손님으로 북적였다. 음식이 맛있기도 했지만, 입지가 좋았던 덕도 컸다. 찻길 건너 수많은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고, 그에 비해 식당은 턱없이 부족했다. 근처 몇 안 되는 가게에 인파가 몰렸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돈을 들고 찾아왔고, 부모님은 짧은 시간 안에 꽤 많은 돈을 모았다.


부모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고 나와 동생에게 따스한 관심과 사랑 대신 과자 하나가 백 원 하던 시절 하루 용돈 천 원을 쥐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넘치는 용돈이 그 시절 부모님이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제일 돈 많은 아이였다. 먹고 싶은 간식을 사 먹고도 돈이 남아돌아 주변 아이들에게 펑펑 돈을 썼다. 하굣길에는 간식을 얻어먹으려는 친구가 꼭 한두 명씩은 나를 따라다녔는데 거들먹거리는 내 표정이 아주 재수 없었을 것이다.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내 성격은 최고로 더러웠다. 새침데기에 누구에게 지는 걸 싫어해서 나보다 몸집이 큰 누나, 오빠와 싸움이 붙으면 바로 긴 막대기 같은 걸 찾아 들어 악을 쓰며 휘둘렀다. 이러니 동네 아이들에게 돈을 그렇게 쓰고도 인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나보다 착하고 순둥순둥한 내 동생을 더 좋아했다. 놀이 규칙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꼬마 아이까지 '깍두기'라는 이름으로 끼워줬던 시절이어서 그랬던 것인지 동네 아이들은 성격 나쁜 나를 아무도 따돌리지 않고 같이 놀아 줬다.


식당을 나서면 찻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늘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공장이 보였고 다른 한쪽엔 빨간 벽돌 빌라들과 아빠의 호프집, 엄마의 식당을 포함한 작은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서로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학교가 끝나면 너 나 할 것 없이 빌라 앞으로 모였다. 우리는 공장들 사이 폐수가 흐르는 도랑에 돌을 던지기도 하고, 날씨 좋은 날엔 친구들과 '얼음 땡', '깡통차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를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놀았다. 그 골목 가게들은 모두 친구네 집이었고, 대부분 쪽방이 있어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어주었다. 슈퍼, 문구점, 인쇄소, 철물점... 골목 전체가 우리 놀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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