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 위에서 시작된 마음

by 앙또아


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아 그림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점심시간에 잠깐 자리를 비우는 시간을 제외하곤, 꼼짝없이 의자에 붙어 있는 생활. 처음엔 몰입감에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 여기저기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어깨는 뻐근하고, 허리는 굳어갔으며, 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보니 다리마저 무거워졌다.


그래서였을까.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동호회였지만, ‘스윙댄스’라는 말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음악에 맞춰 마음껏 몸을 흔들고 싶었다. ‘스윙댄스? 그게 어떤 춤이지?’ 궁금해진 나는 관련 영상을 찾아봤다. 화면 속에서는 사람을 높이 던지고 허리에 둘러메며 거의 서커스를 방불케 했다. 순간 겁이 났지만 곧 알게 됐다. 그건 대회 장면이었고, 실제 수업에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쉽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기대를 걸고, 조심스레 신청서를 작성했다.


드디어 첫 수업 날. 설렘과 약간의 긴장이 뒤섞인 마음으로 동호회 장소를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 낯선 동네에 도착하자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약도를 따라 큰 도로를 지나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조용했던 거리 풍경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낡은 간판과 비어있는 듯한 가게들, 거리 한쪽엔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낯선 사람들. ‘정말 여기가 맞나?’ 하는 순간, 멀리서 재즈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윙바는 생각보다 깊숙한 곳에 있었다. 좁은 골목길 끝,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벽면 가득 형형색색의 그라피티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벽돌 위에 춤추는 사람들의 실루엣과 활짝 웃는 얼굴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옆으론 ‘LET’S DANCE!’라는 커다란 글씨가 써져있었다. 입구 앞에 다다르자, 문 너머로 스윙 재즈 특유의 경쾌한 리듬이 더욱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베이스와 브라스, 드럼이 어우러진 흥겨운 소리에 내 발끝도 자연스레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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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니 스윙바안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그 넓은 공간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뜨거운 열기로 후끈했다. 내가 속한 기수는 역대 최다 인원이라 했고, 실제로도 남녀 합쳐 백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 있었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수업이 시작되자 남녀가 두 줄로 서서 원을 만들었고, 그 중심에는 두 명의 선생님이 섰다. 처음 접하는 춤이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생전 처음 마주한 이성과 손을 맞잡는다는 사실에 처음엔 어색하고 긴장됐지만, 동작 하나가 끝날 때마다 파트너가 바뀌니 점점 편해졌다. 그날, 평생 잡을 남자의 손을 다 잡아본 기분이었다.


파트너와 나란히 손을 맞잡고 스텝을 맞추던 순간, 오래된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실 한가운데서 아빠와 엄마가 웃으며 지르박을 추던 장면이었다. 아빠가 장난스럽게 손을 내밀면, 엄마는 밝게 웃으며 그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나는 그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었다. 그때의 내가, 이제는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귓가에 흐르는 재즈 음악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수업이 끝나자 누군가 자연스럽게 “이따가 뒤풀이 가실 분~?” 하고 외쳤고, 사람들은 웃으며 하나둘 모여 근처 호프집으로 향했다. 길게 붙은 테이블에는 맥주잔과 기본 안주가 순식간에 놓였고, 서로 이름을 묻고 건배를 하며 분위기가 빠르게 풀려갔다.


“오늘 춤 너무 잘 추시던데요?” “아니에요, 선생님이 잘 리드해 주셔서요.” 그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춤이라는 공통의 경험 덕분에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각자 오늘 수업에서 실수한 이야기나 발이 엉켰던 순간을 꺼내며 웃음을 터뜨렸고, 어색한 순간이 생기면 어김없이 “진짜 초보 맞으세요?” “연예인 닮은 거 같아요” 같은 너스레가 오갔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자 대화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연애 이야기로 흘러갔다. 동호회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결혼 적령기였고,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어쩌면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뒤풀이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나는 막차 시간을 걱정하며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그때, 뒷자리 테이블에서 들려온 대화가 문득 귀에 꽂혔다. 이번 기수의 막내라는 스물여섯 살 남자가 모태솔로라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냐?”, “이상형이 어떻게 돼?”라며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고, 그는 점점 작아진 목소리로 “여자분이기만 하면...”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단정한 인상에 키도 작지 않았고, 말투도 예의 바른 편이었다. 이성에게 인기가 없다는 말이 선뜻 와닿지 않았다. 그는 자꾸만 자신을 깎아내렸고, 주눅 든 채 축 처진 어깨가 왠지 모르게 눈에 밟혔다.


그렇게, 남편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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