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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해 Sep 30. 2022

방송국을 떠나기로 했다

취재작가 잔혹사



대학 졸업 후 방송작가는 다달이 월급을 받으며 작가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선택한 일이었다.



어떤 프로그램에 지원할까 고민하다, ‘다큐멘터리’가 계속 눈에 띄었다. 고등학생 때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고 학부 시절 청년 유니온이라는 단체에 잠시 몸담았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면접을 보고 정식적인 첫 사회생활을 방송국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집에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곳이었지만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사옥, 방송국 내부를 오갈 수 있는 출입증,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을 보며 설레고 긴장됐다. 며칠 미리 가서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2시간가량 이야기를 듣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걸 다 해야 한다고?’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주말 동안 머리가 지끈했다. ‘사고 치면 어쩌지, 그만둔다고 말해야 하나?’




첫 주에는 아이템을 선정하고 자료조사를 했다. 평소에 관심 있게 눈 여겼던 이슈를 후보에 올렸다. 경력단절 여성, 장애아동, 크레인 사고, 최저 임금 등. 2주 차부터 섭외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섭외를 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학력의 전문직에 종사했던 경력단절 여성을 찾아라, 라고 하면 내 주위에서건 인터넷을 뒤져서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야 했다.



주위 동료들에게 물었다. “보통 섭외는 어떻게 하세요?” 그들도 정해진 방법이 없다고 한다. 생각나는 방법을 모조리 동원하는 수밖에. 심지어 다른 팀의 주제는 ‘아동학대’와 ‘데이트 폭력’이었는데 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물론 가해자들까지 섭외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말도 안 되는 요청을 당연하게 하는 태도와 분위기에 기가 막혔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이런 무식하고 무례한 일이 다 있나 싶었다.



3주 차에 들어서면 슬슬 섭외 압박이 들어온다. 얼른 촬영을 나가고 싶은 피디들과 제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걱정하는 메인 작가는 상황을 묻는다. 조건에 적합한 사례자를 찾는 것도 어려운데 그 사례자의 개인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더 어렵고, 일반인에게 방송 출연을 설득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노련함이 필요했다. 태생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나는 가뜩이나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통화하는 일이 무척 스트레스였다. 통화선 너머로 능청스러움과 넉살, 그리고 인간미까지 갖춘 사람 좋은 사람을 매일 연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는 단연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당사자들의 처한 상황과 마음을 가장 직접적이고 내밀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알려 더욱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기도 하고, 너무 깊고 소중한 이야기에 때론 빚진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 사람과의 통화는 짧게는 30분 길면 2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통화를 끊고 나면 손목이 지끈거렸고 핸드폰 액정이 닿은 귀와 볼이 뜨거워졌다. 각종 기관과 여러 사례자가 뒤섞여 통화하는 진통을 겪고 나면 해가 져 있었다.




자료조사, 취재, 섭외, 촬영, 자막, 예고편, 보도자료, 종편, 시사. 방송 제작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어느 하나 취재작가의 손이 거치지 않는 단계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화장실 갈 시간은 물론 물 먹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속한 곳은 교육 방송이라 시청률의 압박도 적고 다른 방송사에 비해 업무 강도가 낮은 편이었지만 매일 동료들과 막차를 타고 귀가했고, 집에 도착해 씻고서는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 정도 누워 핸드폰을 하다 잠이 들었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취재작가들은 밥을 먹을 때도 맘 편히 먹질 못했다. 핸드폰 알람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렵게 섭외한 사례자가 마음이 바뀌었다든지, 아니면 기껏 촬영을 보냈더니 취재했던 내용과 다르거나 장소에 조금의 문제가 생겨도 모두 취재작가에게 연락이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늘 핸드폰을 달고 살았다. 요금제는 입사하자마자 무제한으로 바꿨다. 회사에도 전화기가 있었지만 어떤 취재작가도 회사 전화를 이용하지 않았다. 주말에 친구를 만나거나 예배를 드리는 중간에도 벨소리 하나면 총알처럼 튀어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이런 형국에 섭외나 촬영 기간인 작가 중에서는 소화가 안 될 것 같다며 점심을 거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섭외할 사람은 많고 적합한 사례자는 없고 방송 날짜는 자꾸만 다가오는데 나 때문에 방송이 엎어지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실제로 섭외가 안 돼 제작 중간에 다른 아이템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피디와 메인 작가가 아닌 취재작가가 방송 전반에 대한 과중한 책임과 부담을 느끼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섭외 시기마다 극도의 불안이 왔고 그 불안은 신체로 나타났다.



일찍 출근했던 어느 날, 핸드폰 소리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 시간대에는 전화가 잘 안 울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였다. 알고 보니 모닝콜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이후로 어떤 일에 조금만 문제가 생길 거 같은 느낌이 들면 심장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심지어 주말 집 화장실에서 아무 생각 없이 소변을 누는데도. 몸이 망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정작 방송작가는 방송국 소속 직원이 아니었다. 프리랜서지만 매일 같이 정해진 곳으로 출근을 했다. 반면 피디 밑에 있는 조연출은 정규직이나 계약직이었다. 계약직이어도 야근과 출장 수당이 꼬박 꼬박 나오고 퇴직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작가와 피디라는 직업군 사이에서 매번 피해 의식이 생겼다. 내 일, 네 일이라고 나누고 싶지 않은데 내가 더 많이 일하는데 왜 쟤가 더 많이 가져가고 대우를 받는지 화가 났다. 피디나 조연출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작가의 경우엔 그런 감정이 더 했다.



촬영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면 ‘내가 작가라서 이런 일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정규직 여자 조연출이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면 "똑똑한데 마음도 곱네"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30년 이상 일한 대학에서 교수로도 강의하는 메인 작가를 하루아침에 피디가 문자로 해고 통보를 한 경우도 보았다.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에 무척이나 의미와 보람을 느꼈고, 열정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역동적인 현장이 설렜고, 결혼 이후에도 경력을 유지할 수 있는 직군이라 좋았고, 몇십 년 몸담다 보면 괜찮은 보수에 일도 전문적으로 잘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메인 작가가 돼서도 피해 의식에 시달리는 고용의 구조가, 휴일도 사생활도 없이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몸이 망가지면서 불안까지 시달려야 하는 방송 전반에 깔린 불안정성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심장 박동 소리는 방송국을 그만둔 지 2년이 돼서야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주말에도 일에 대한 전화가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않고, 평일에도 연차를 내서 친구와 전시를 보러 가거나 밝은 대낮에 바깥 공기를 마시며 찬찬히 걸을 수 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그나마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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