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곧 나였던 삶 - 방송국(1)

by 안해


이십 대에 세 곳의 회사를 다녔다. 일은 곧 자아실현이었다(과거).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본의 논리가 강하게 돌아가는 곳은 자연스럽게 발길이 가지 않았다. 졸업 후에 다닌 세 회사와 그곳에서 한 일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


첫 회사는 한국교육방송공사였다. 줄여서 EBS라고 부르는 곳. 일산 거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는 EBS 신사옥은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답게 기분 좋은 깔끔함을 가지고 있었다. 구내식당도 있어 시간도 아끼고,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치명적 단점이 있었으니, 위에서도 말했듯이 일산에서도 외곽이라 회사를 나오고 들어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출퇴근은 무려 왕복 3시간이 소요됐고 환승도 2번이나 해야 했다. 한 피디님도 매봉에 있을 적에 비해 촬영을 오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며 힘들어했다.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방송 다큐멘터리 취재 작가의 일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라고 하면 휴먼 다큐나 SBS스페셜과 같은 시사 교양 다큐멘터리를 꼽았다. 드라마를 배우다가 비드라마로 넘어간 나는,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을까 고민하다 EBS의 SBS스페셜 포지션 격인 ‘다큐 시선’이라는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결과적으론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궁금했던 사회의 모습들을 파헤쳐보고 공부하고 가까이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선에 있었던 1년 동안 총 6개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50분짜리 다큐멘터리 1개를 제작하는데 2개월이 소요된다) 시골 빵집, 최저 임금, 임대 아파트, 장애 아동, 경력단절여성, 해고자에 대해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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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골 빵집


우선 시골 빵집은 나에게 ‘로컬의 가능성’을 알려준 회차이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 모두 수도권에 산다. 명절마다 할머니를 뵈러 시골에 가느냐 고속도로에서 몇 시간씩 파절임이 됐다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부러워했다.

시골 빵집이 아이템으로 확정되기 이전에, 원래 주제는 ‘시골 가게’였다. (이걸 더 강력하게 내세웠어야 하는데 당시 나는 분위기를 따라가기 바빴다)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창업을 한 이들, 특히 부부들을 많이 인터뷰했다. 이때 처음으로 시골의 존재와 로컬의 가능성을 보았다.

취재하면서 당장이라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 내려가 가게를 차리고 싶었다. 5년이 지난 현재, 로컬에 가능성을 보고 지역으로 내려간 청년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심지어 정부에서도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청년의 로컬 이주를 장려한다.

아마 시골 빵집 다큐를 만들며 만났던 이들이 아니었다면, 여행을 가서 귀촌인들에게 관심도 갖지 않았을 거고, 그랬다면 귀농귀촌 교육이나 시골 체험 프로그램도 참여할 생각을 못했을 것 같다. 삶의 새로운 대안을 품고 그런 대안을 실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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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the Record

((( 방송 제작 자체는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처음에 기획했던 ‘시골 가게’가 아닌 ‘시골 빵집’으로 방향을 틀면서 다양한 가게를 연 사람들과 로컬에 대한 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소재는 분명 ‘시골’인데 제주도를 가고 싶다는 피디님의 요청에 따라 제주도에 있는 빵집을 섭외하기 이르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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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저임금, 인상 그 후


이 아이템은 메인 작가님과 처음 면접을 보았을 때 내가 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아이템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하려니 그다지 끌리진 않았다. 그래도 하면서 소정의 성과(?)는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문재인 정부로 최저임금 인상 폭이 급격하게 올라 사회 이슈가 많았고 그 여파도 굉장히 컸다. 나는 대학생 시절 청년 유니온에서 (아주 잠깐) 참여할 정도로 노동 문제에 관심이라기보다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때 노무사에게 노동법 강의도 듣고 자본론이라는 책도 함께 읽고 이야기하며 다른 데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양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의 활동 중 하나가 최저임금 1만 원 주장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최저임금이 훨씬 더 낮았기 때문에 최저임금 1만 원은 무척 억지스러운 요구처럼 들렸다. 사실 나는 최저임금 1만 원에 그다지 동의가 되지 않았는데, 그들에게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 때문은 아니었지만 결국 나는 긴 여행을 떠난다는 이유로 청년 유니온 활동을 생각보다 이르게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최저임금에 대한 논의는 나에게 정리되지 않은 문제였다.


몇 년이 지나,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최저임금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노동자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용자 쪽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최저임금 인상을 악용하는 기업이 있었기 때문인데, 부담되는 노동비를 감당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이때다 싶어 대량 해고를 하거나 상여금을 연봉에 포함시켰다. 이런 곳에 다니는 직원들은 최저임금을 인상한 정부를 욕하거나 기업에 대항해 시위를 벌였다.

최저임금에 따라 월급이 책정되는 사람들은 최저임금이 오르고 나서 훨씬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똑같은 서민이라도 영세한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이 오르고 직원이나 아르바이트 생을 쓸 수 없어서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느냐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고 이야기했다. ​


내가 깨달은 점은 무조건적인 노동비 인상이 서민들의 삶을 향상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상 쪽에 더 마음이 실리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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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the Record

((( 방송 제작하면서 같이 일하던 조연출이 도중에 퇴사해버리고 나까지 나가버릴까 생각할 정도로 팀은 뒤숭숭. 역대로 섭외 및 출연자가 많았던 프로그램. 주간 회의 때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섭외했냐는 질문도 받았다. 다행히 시청률이 잘 나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는데,,^^








3) 도시의 섬, 임대 아파트


나는 제목과 같은 작명을 어려워한다. 한 회차의 제목은 거의 취재작가나 함께 팀을 꾸려 일하는 조연출이 주로 짓고 한다. 여태 내가 지은 우리 팀의 방송 제목이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는데, 새로 온 조연출 친구가 멋들어진 이름을 지어주었다. 조금 슬픈 수식어지만. ​


도시의 섬, 임대아파트는 아이템 후보로 나왔을 때 정말 정말 선정이 되지 않길 바라던 소재였다. 그 이유는 내가 정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대아파트의 뜻은 물론, 전세와 월세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부끄…) 당연히 보증금이 뭔지도 모르고. 그만큼 살면서 주택 문제를 고민해볼 상황이 없었다. (감사해야 하는 거겠지..?)

안 그래도 주택 문제에 문외한인데, 주택법까지 난무하니 정말 머리가 터져 죽을 뻔했다. 임대 아파트의 정의부터, 현재 보급 상황, 문제 되는 점, 임대 아파트의 세입자들까지. 경남 진주에 본사가 있는 LH 홍보팀 관계자 세 명까지 방송국으로 불러 만났다. 떨리면서 부담스러웠다. 방송 준비로 LH와 SH의 존재를 제대로 처음 알게 되었고, 공공임대와 민간 분양 등의 개념을 알게 됐다.

영구 임대아파트, 주로 기초생활수급자들이나 장애인 분들이 많이 사는데 여기는 거의 슬럼가 같은 분위기였다. 아파트 내부는 곰팡이에 물이 새는 건 기본. 촬영을 갔다 온 조연출이 약간의 공포 분위기도 느꼈다고 했다.



임대아파트에 어렵게 분양을 받아서도 사회적 인식 때문에 힘들어하고, 이사 가는 경우도 다분했다. ‘휴거’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고 너무 놀랬다. 보통 공공 임대 아파트에 휴먼시아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휴먼시아 거지’라는 말의 줄임말이란다. 더 놀라운 건 성인들 사이에서가 아닌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불린다고 한다.

어른들도 일반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사이에 벽을 세워두거나 통과하지 못하도록 진입로를 막아둔다. 이 경우 목적지까지 빙 돌아가야 한다. 같은 아파트에서 임대인들은 거주자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집을 산 사람들만 참석 자격을 얻는다.​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한다. 집값이 떨어질까 봐 세입자가 줄어들까 봐, 임대아파트의 건축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현수막을 건다. 요즘 막 지어지는 청년 주택, 행복 주택에 대해서 그렇다. 사회 교과서에서만 보는 님비 현상. 그놈의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몸 서리치게 되는 회차였다.

하늘을 찌를듯한 집값 때문에 정부는 양질의 임대 아파트를 보급하는데 힘쓰고(또 많이 보급하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이야길 들었다), 집값이 떨어질까 봐 임대인들은 임대 주택에 반대하고, 청년들은 사실상 4, 5평의 임대 아파트에 몸을 구겨 넣고 사는 게 현실이었다.​


집값이 계속 상승하는 이유나 부동산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청년과 서민이 생계에 허덕이는 상황은 안다. 집값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무리한 대출을 해서라도 빌라나 오피스텔이 아닌 무조건 아파트를 사야 한다는 사실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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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읽히는 스테디셀러(?) 난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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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에 쓰였다. 산업화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의 참상을 그린 소설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저렴한 임대 아파트, 청년 월전세금 지원 등 사회 보장제도의 혜택을 그래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나 또한 처음으로 자취를 하면서 10개월 간 20만 원씩 청년 월세 지원을 받았다. 감사했지만 일시적인 방편이기도 했다. 결국 우리의 최종 목적은 내 집 마련이다. 아니 내 아파트 마련.​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쉼 없는 노동을 한다. 5년, 10년 계획을 짠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 부자가 됐다는 책들을 소비한다.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내 집(아파트)을 마련하여 살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 집에서 나의 아이들과 함께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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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많다. 세상이 좋아졌지만 좋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사회 주택, 코리빙 하우스 등 거주에도 먹거리처럼 다양한 선택지들이 생겼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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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the Record

((( 최저임금으로 몰아치던 나의 멘털은 계속 최악으로 치닫는데… 동료들이 내 얼굴을 보며 점점 피폐해져 간다고, 창백해져 간다고도 했다. 방송 섭외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그래도 예고 만들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동갑내기 조연출과 밤을 새우면서, 중간에 배고프다고 치킨 시켜 먹고 갑자기 편집하다 말고 둘이 소주에 감자탕 먹으러 나가고, 추억을 많이 쌓아서 지금도 그 친구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올라 재밌고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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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길 하다 보면 왜 이리 맨날 끝도 없이 길어지는지 다음 편에는 장애 아동, 경단녀, 해고자 편에 대한 이야길 마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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