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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에 빚지며 살고 있습니다.

by 안 희



고정 역할로 처음 드라마를 찍었을 때의 일이다. 평소 표현이 자유롭고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인 나는 오디션을 봐도 긴장을 하는 일이 드물었다. 스몰토크를 할 정도였으니까. (내 기억에는) 이런 화끈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하신 감독님은 내게 남자주인공을 짝사랑하는 후배역할을 맡겨주셨다.

문제는 나의 이 화끈함이 다른 쪽에서는 전혀 발휘를 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고장이 났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6년을 짝사랑을 하고도 정작 상대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조차 몰랐을 정도였다.


나는 역할을 통해 여자주인공에게 질투를 만들어줘야 했다. 그런데 내가 수줍음을 타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뭘 못한 건지를 아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 당시 나는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조차 모르는 완전 신인이었다.


“라면 먹고 갈래? 라도 좀 해봐.” 답답해진 감독님은 나의 화끈함을 꺼내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를 유혹해 본 적 없던 나는 꺼낼 수 있는 화끈함이 없었다. 나는 계속 고장 났고 현장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후로 오디션 장에 들어가면 화끈함을 보여주지 않았다. 질문하기 전 까지는 입을 닫고 있었고 딱 필요한 만큼의 대답만 했다. 싹수없어 보여도 이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현장에서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하니 정말로 해야 할 말만 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국정원 직원, 국정원 요원, 경호원.. 다시 말이하고 싶어졌다. 감정이 있는 사람을 연기하고 싶어졌다.


우리들 모두의 안에는 다양한 면이 살아있다. 나는 그 사실을 연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며 깨달았다. 배우의 도구는 자기 자신이기에 훈련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잘 알게 된다. 욕망과 결핍, 질투와 연민, 정의로움과 비열함 과 같은 모든 색들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여기서 희망을 찾았다. 평소의 나 같지 않아도 다른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는 말인 거니까.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됐다. 새로운 감정의 발견은 곧 가능성이 되었고 좋든 싫든 간에 재료가 될 자산으로 여겼다. 사람과 일상을 오브제로 사용해 설치미술에 담아내는 양정욱 작가님은 한 인터뷰에서 기술을 편지와 같다 말했다.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글을 쓰지만 글이 너무 엉망이라 매일매일 글씨를 교정하고 단어를 골라보고 재밌는 말을 고민하며 계속 연구해서 편지를 쓰는 일. 그 과정에서 편지를 잘 쓰게 되는 것. 그는 기술이 사랑으로 탄생된다고 했다.


연기를 잘하고 싶어 배우게 된 기술에서 사랑을 배우게 된 나는 가끔씩 연기에게 빚지며 살고 있다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었던 나는 주변에 떠다니는 사랑도 느낄 수 있게 됐다. 세상에는 다양한 모양을 가진 사랑이 존재한다. 모든 사랑은 이야기로 탄생될 수 있어서 어떤 사랑도 좋다 나쁘다, 판단될 수 없다. 그냥 사랑일 뿐이다. 내가 '나'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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