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말
살면서 인생을 바꾸는 문장, 책, 영화, 사람이 하나쯤은 만나게 된다. 말소리에 형태가 생기고 글이 소리가 되어 마음 한편에 남아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영혼을 피어나게 해 준 반짝임이 나에게도 있다.
내 안의 말소리는 2015년 봄날에 저녁의 선선함을 타고 내 마음에 가라앉았다. 동네는 언니가 살던 곳이었고 우리는 족발에 소주를 마시고 나왔다. 언니네 집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서 먼저 집에 데려다주고자 우리는 언덕을 함께 넘었다. 노란 불빛 아래에서 술이 차 가빠진 숨이 떠다니는 공기에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깜깜한 밤하늘을 전세 낸 듯 시원시원한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우리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청춘의 영혼들이라 말했을 것이다.
언니의 영혼은 맑고 따뜻했다. 나만 아는 비밀이 아니었다. 그녀의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고 눈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원하는 것들이 사라졌다. 그녀 앞에 앉아 있으면 품은 기대도 사라지고 나에게만 바라는 사랑도 필요가 없어졌다. 제발, 부디 만인의 여인이 되길 바랐다. 그녀는 그래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언니만큼 가까이에 간 영혼을 나는 만나지 못할 만큼 인간보다 꽃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지안아, 배우는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해. “
나는 그녀를 사모했다. 그녀의 연기는 장르를 넘나들고 매체를 가리지 않았다. 그윽한 그녀만의 향기 속에 사뿐하고 현실 같은 그녀만의 연기를 사랑하는 나는 그녀의 연기를 모네의 그림처럼 바라봤다. 마치 비법을 나에게만 속삭이는 것처럼 술에 취한 정신의 음성 속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 안에 닫힌 자물쇠가 그녀의 젊은 시절에서 나에게로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없이 봄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했다. 그녀의 손은 항상 따뜻했다.
생각보다 자물쇠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 그녀의 삶보다 길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영원히 곁에 있을 것만 같았던 천사는 마치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 된 선녀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동시에 많은 걸 잃었다. 단 한 사람의 영혼이 돌아갔을 뿐인데 나는 여러 사람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언니를 잃었고 유일한 선배를 잃었고 훌륭한 배우가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그늘 아래에서 따스함을 받고 기운을 차렸는데 순식간에 미아가 되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그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언니의 영혼을 아쉬워했다. 나는 어디에서도 그만큼의 아쉬움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 아쉬움으로 여전히 그녀를 떠올리고 그리움으로 편지를 쓴다. 봄날의 숙제는 그리고 유언이 되었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24년 12월 5일 오늘이 되어 여전히 흐르는 중이다. 잡힐 것 같이 알 것 같은 이 질문의 열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바람같은 이 질문이, 찾은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수수께끼같은 형태가 이 질문의 전부인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하나쯤은 새로운 것들이 생겨 나기에 나는 바람이다. 수수께끼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이 문장은 다행히 끝나지 않아 그녀를 동시에 잊지 못하게 한다. 그녀의 영혼은 하나의 문장에 담겨 내 마음에 있다. 이 문장이 그녀와 같은 배우가 되도록 그 향기의 영혼이 되도록 내 앞길에 등불이 되어 밝혀주고 있다. 너무 보고싶다.
만일 나를 커다랗고 살 많고 둥근 사과에 비유한다면, 나 자신에 대한 내면적, 외면적 상투 이미지들은 그 한 조각 - 아마도 장밋빛 볼 같은 겉껍질을 가진 조각 -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사과 전체로서의 나 자신 - 단단한 속살과 썩은 갈색반점, 꼭지, 씨, 깡치가 모두 포함된 -을 파악해야만 한다. 사과 전체가 나인 것이다.
- 우타하겐의 저서, <Respect for Acting>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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