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를 시작한 지 18일이 흘렀습니다. 아직은 여행자 같은 신분으로 살고 있으며 누가 봐도 팔자 좋아 보이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친구사이도 싸우고 나면 예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듯이 가을태풍과 신고식을 치르고 나니 약간의 애착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산책로의 반경도 점점 넓혀가고 있고요. 그럼에도 벌써, '한 달 후'라는 좋은 타이틀까지 버리고 성급하게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은 건 생각보다 호전이 빠르게 되었고 그 부분이 너무 신기해서요. 거두절미하고 바로 꺼내어볼게요.
제주의 마법 첫 번째 : 나에게 하는 집중이 자연스럽게 '된다'
환경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합니다. 표선은 바닷가가 꼭 붙어 있어서 날씨의 영향을 직관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어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파도가 높이치고 맑은 날은 잔잔해요. '뭐야, 당연한 거잖아? 나도 알아 그 정도는.'
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 아는 일을 눈으로 확인해 보면서 살고 계신가요?
이곳은 알고 있던 것들을 보여줍니다. 어쩔 수 없이 흐린 하늘, 구름 사이에 낀 해를 보게 되고 어제의 습기와 다른 오늘의 뽀송함을 피부로 느끼며 그 차이를 알게 해 줍니다. '하늘이 물든다'라는 표현이 이런 거구 나를 알게 해 주며 맑아진 하늘 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서 '날씨가 좋아 행복하다'라는 말을 쓰게 해 줍니다. '겨울이 걸음 속도에 완벽히 발맞추며 느긋하게 산책하기', '몸에서 원하는 음식을 알아차리기' '해지는 방향을 따라 걷기' 등.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글자로 알고 있던 것들에게 색과 움직임, 냄새와 느낌으로 장면을 만들어주며 장기기억보관소를 채워줍니다.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며 깊이 빠지는 편이에요. 그중엔 이념으로 굳어진 것도 있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벽도 있었습니다. 이토록 어렵게 생각하며 살아왔던 과거의 모습들은 가부좌를 틀거나 기도를 하지 않아도 나타났습니다. 그저 자연이 보여주는 걸 그대로 보고 머물렀을 뿐인데 도시에서는 안되던 알아차림이 사소한 것들을 통해 일어나는 거예요.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괜찮아지려는 노력도 생각을 비우려는 정성도 알아차리고자 한 정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신기했어요.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부딪히며 알게 된 값은 달랐어요. 나만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더 노력을 해야 하고 고민을 해야 하는 줄만 알았어요. 그게 되지 않는 건 내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죠. 그건 환상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도 있다는 걸 기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네가 할 일은 오직 바라보고 머무는 것, 이 순간 존재하는 것만 하면 되는 거라고 알려줘요.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을 둘러보며 내가 있던 곳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환경은 아니었는지 처음으로 제삼자가 되어 응시해 봅니다.
현재 내가 속해있는 세상은 나에게 어떤 걸 보여주고 있나요?
제주의 마법 두 번째 : 지나치던 것들을 바라보게 해 준다.
우리 집은 핵가족입니다. 아빠, 오빠 그리고 나와 겨울이 (2022년 기준)가 전부예요. 부모님 두 분 다 외동이라 친척의 수도 적습니다. 외할아버지의 형제분들의 가족들이 전부예요. 소가족의 장단점은 명절에 도드라집니다. 편하기도 하면서 외롭기도 하죠. 엄마 대신 우리 남매를 키워준 친할머니의 제사와 차례를 약소하게 지내고 있어요. 차례상은 우리 세 식구가 오랜만에 모여 앉아한 끼 식사를 하는 소중한 상이기도 해요. 제주도에 와서 일주일 정도 지나고 추석을 보냈어요. 가족들 없이 보낸 첫 추석이었어요. 제주도 어멍집에서 시끌벅적 대가족의 바이브를 느끼고 돌아와 처음으로 혼자 할머니의 차례상을 준비했습니다.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어요. 보통 여자는 절을 올리지 않잖아요. 맹목적으로 따랐던 행동 중 하나로 저도 아빠와 오빠가 절을 올릴 때면 늘 뒤에 서서 지켜만 봤어요. 할머니께 처음으로 절을 올리고 숟가락을 들어 밥을 떠드렸어요. 음식 위에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습니다.
"할머니. 오늘은 처음 드셔보는 음식이지? 제주도 음식이다. 차린 건 없지만 손녀딸이 밥 한 끼 차려줬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맛있게 드셔줘, 알았지?"
마치 마주 앉아 밥을 먹듯 가만히 지켜봤어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려고 생각해 봤는데 도통 모르겠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릴 키워주던 그때도 할머니는 할머니였는데 힘들었겠다. 할머니가 뭘 잘 드셨는지, 뭘 좋아했는지 내 기억에 하나도 없네?..
미안해. 아빠가 좋아하는 건 꼭 기억해 두어야겠다 그지?"
할머니 혼자 드시는 시간이 적적할까 봐 말동무를 해드렸어요. 할머니와 연결된 기분이 들었어요. 정말로 할머니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이 뭉클하고 따뜻했어요. 성인이 되자마자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렇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거든요. 형식을 따라 반복적으로 하던 일이 새로웠어요. 그 뒤로 우리 집 제사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함께 절을 올리고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추가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숟가락이 추가되고 작은 그릇까지 추가되었죠. 우리 가족들은 이제 메뉴를 갖고 다툽니다. 서로가 기억하는 그들의 '최애음식'이 다 다르거든요. 이제는 명절이 소가족이라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제주의 마법 세 번째 : 역사를 느낄 수 있다.
부끄럽지만 고백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역사를 진지하게 돌아본 적이 없었어요. 학창 시절 때는 암기과목인 역사가 너무 싫었고 일찍 유학을 떠났다는 핑계를 대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연극을 시작하면서, 사건들을 접하기 시작하면서야 의식이 조금씩 생겼는데 제 마음을 크게 울린 하나의 사건은 바로 4.3 사건입니다. 여전히 진실규명을 외치고 있는 우리들의 뼈아픈 역사, 그 상흔들이 제주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아침에 러닝을 하는 코스에서 전환점이 되는 장소에는 해녀분들이 몸을 녹이기 위해 만들었던 돌 불턱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쌓인 돌턱을 보고 있으면 옛 분들의 지혜와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다크투어'라고 아시나요? 역사적인 아픔이 있는 현장을 찾아가 돌아보는 여행, 말 그대로 어두운 곳을 일부러 보기 위해 가는 여행입니다. 이곳에서는 상흔의 흔적을 산책을 하다 발견하기도 하고 신상카페를 찾아간 길목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유적지가 있다는 표지판도 볼 수 있습니다. 삶과 역사가 동 시간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은 제주는 아름다움과 슬픔을 지닌 섬이라는 기분을 들게 하죠. 제주살이의 하나의 목표로 '다크투어'를 해보려고요. 현장의 느낌을 함께 나눌게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추함을 알고 나서야 느낄 수 있고 행복함은 슬픔의 깊이를 유영해 보고 나서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주의 진정한 아름다움 역시, 잊어서는 안 되는 아픔과 잔인함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제주로 오기 직전까지 저라는 사람은 심각하게 빛을 잃은 번아웃상태였어요. 앞날의 희망이 먼지만큼도 없었죠. 살고 싶어서 도망치듯 온 제주에서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저는 아주 잘 지내게 되었어요.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하던 내가 먼저 찾아가기도 하고 스스로 움직여 운동을 하고 우울감을 풀기 위해 이용하던 음식에는 정성을 들여 요리로 만듭니다.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는 저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는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같은 분들의 글들을 보며 얕은 숨으로 버텼었고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환경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아요. 제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용기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아니요, 저는 살기 위해 도망쳐 온 거예요.
이 기록들은 저와 같은 분들에게 글로나마 사진으로나마 동행을 해드리고 싶어서예요. 직접 느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 되는 현실을 탓하지 말고 우리 함께 이야기해요. 저의 기록들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전해진다면 진심으로 좋겠습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제주의 생활이 어떤 마법을 줄지 기대돼요. 내일이 기대되는 희망은 이만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네요. 모두에게 오늘의 일상이 사소한 것들로부터 오는 날들이 행복이기를 바랄게요.
참, 저 취직했어요.
2022. 09. 18
4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