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에서 우리가 만났습니다.
3년전 제주살이 당시의 기록을 재편집 하였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제주에는 완연한 가을냄새가 아침저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가에서 꽃을 발견했어요. 겨울이와 매일 산책하는 길가에도 꽃이 많이 폈습니다.' 분명 어제는 없었던 것 같은데..'라며 꽃에게 물어보기엔 당당한 모습이 마치 졸업을 앞둔 학생 같아서 '내가 못 보고 지나쳤나 보네'라고 인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겨울이는 바닥에 있는 음식을 본능적으로 먹기 때문에 늘 주의주시를 해야 해요. 저는 사방에서 오는 차와 바닥에 깔린 음식물로부터 반려견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죠. 덕분에 제 시야보다 한참 밑에 있는 꽃들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곳곳에서 변화하는 모습들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해요.
그리고 저 출근을 합니다. 일을 시작했어요. 제주도에 오기 전에 친구에게 추천을 받은 가게가 있었어요. 사진에서 본 그곳은 새소리만 들릴 것 같은 동네에 소박한 출입문을 가진 곳이었어요. 오후 3시면 가게 문을 닫고 샌드위치에 올리는 재료들은 특별하고 정성이 가득해 보였어요. 버스로 출퇴근을 하기에는 무리였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꼭 채용되고 싶은 가게였죠. 그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맑고 순수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러쿵저러쿵한 사정으로 제가 일을 하게 된 곳은 다른 곳이지만 제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은 정말 비현실적이거든요. 저는 동화 속으로 출근을 합니다.
표선면 부근에는 어르신 분들이 많이 살고 계세요. 서울처럼 배차간격이 짧지 않습니다. 저의 출퇴근 전용버스는 1시간에서 2시간이 배차간격이에요. 때문에 놓치면 하늘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정류장에 붙어있는 시간표대로 움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스는 언제나 제시간에 각 정류장을 들려야 합니다. 늦으면 어르신들이 탑승을 하시면서 화를 내거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고 심각한지 몰라요. 아무튼 버스시간이 배꼽시계보다도 정확한 곳이다 보니 저의 출근 루틴 역시 정류장 도착 시간에 맞춰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타야만 하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그 버스는 늘 제시간에 도착하지만 저는 항상 10분 전에 버스정류에 나갑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밝아진 세상빛이 제 알람이에요. 일어나서 출근준비를 한 뒤에 책을 읽으며 아침을 먹고 난 후에 겨울이와 산책을 짧게 하고 출근을 해요. 버스 안에는 학생들이 가득합니다. 서너 정거장만 지나면 학생들은 등교를 하고 버스는 마치 아이를 학교 보낸 엄마처럼 여유 있고 늠름하게 출발을 해요. 큰 도로를 지나 이내 삼달리에 들어서면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동네구경이 아주 재미나요. 작은 집들이 붙어있고 대문은 열려있고 낮은 지붕 위로 하늘이 바다처럼 펼쳐져있죠. 곳곳에는 농사를 짓는 흙색과 풀색이 보이고 하나의 동네를 넘어가면 언덕을 넘어가는데 그 언덕 끝에는 가을억새가 드리우져 있습니다. 바람에 춤을 추는 모습들을 더 보고 싶지만 버스는 스포츠카처럼 질주를 합니다. 제 시간 안에 다음 정류장에 도착을 해야 하니까요. 매일 아침 찰나의 순간들이 아쉽지만 덕분에 한 번도 지각은 한 적이 없습니다.
정류장에 내려 가게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동화가 시작됩니다. 마법의 비밀을 풀기 위해 들어가는 어느 마을의 모습을 꼭 닮아있거든요. 고사리 밭을 구경하며 쪼그리고 앉아 풀들을 관찰하며 약간의 여유를 부립니다. 어느 날엔 하늘이 너무 예뻐서 발이 멈춰지고 어느 날엔 돌벽 사이로 올라온 호박이 귀여워서 멈춰 섭니다. 일터로 가는 길이 미치도록 좋아서 언제나 행복이 가득 찬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엽니다. 행복은 다짐으로 얻어지는 게 아닌가 봐요.
여기서는 칼퇴가 아쉬워요. 퇴근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재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말이 길어지면 여기저기서 빨리 가라는 소리로 저를 재촉합니다. 버스가 7분 뒤에 오거든요. 이곳은 산 중간에 있어서 놓치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버스가 안 오네요. 벌써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죠. 이렇게 늦으면 어르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무슨 일이지? 싶지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어쩔 수 없지'의 너그러움은 제 생각에 이유를 알고 난 후에야 할 수 있는 관용인 것 같아요. 이유도 모르는 채 기다리는 건 곤욕입니다. 답답했어요. 360도를 둘러봐도 물어볼 곳이 있나 사람이 있나. 반대편 쪽에 버스정류장에 할머니 한 분만 보일 뿐 제 주변은 말 그대로 '새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뇌가 바빠졌습니다.
'다른 방법을 구색해 내자. 우린 탈출을 해야 해. 다음 버스는 1시간 40분 뒤에 온단 말이야!'
반대편 정류장 쪽으로 갔습니다. 이쪽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희망이 생겼어요. 다음 버스는 50분 뒤에 도착합니다. 그 사이에 환승을 알아보면 되는 거니까요,라고 말은 하지만 동동 구르는 발을 숨기기는 어려웠어요.
"학생 어디 가요? 즈쪽 버스 고장이 나서 안 온대요. 다른 버스 타세요."
"감사합니다. 저는 표선으로 가는데요.. 혹시 여기서 타도 갈 방법이 있을까요?"
'
할머니 덕분에 살았습니다. 상황을 들어보니 버스가 안 와서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봤더니 오다 고장이 났더랍니다. 다음 배차를 타셔야 할 것 같다고 하길래 할머니도 반대 방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였어요. '버스가 제시간에 안 오면 회사에 전화를 해 봐야 한다.' 인생의 큰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분은 좀 전까지 제 옆에 계셨던 할머님이셨어요. 통화를 하며 버스를 기다리다 이 상황을 자각하고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계셨던 할머니, 어느덧 반대편에 앉아 느긋하게 다른 버스를 기다리고 계신 할머니, 이렇게 우리는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새소리가 들립니다. 이제야 '까짓 껏 뭐, 책 보면서 기다리면 되지 뭐'란 가냘픈 허세가 올라옵니다. 안정을 찾은 거지요. 할머니는 학생에게 말을 겁니다. 저는 제 소개를 했어요. 서울에서 내려와 이쪽 골목 안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서 일을 한다고. 제주살이 하러 강아지랑 같이 왔다고. 할머니도 커피를 좋아하신대요. 할머니는 할머니보다 더 할머니인 할머니를 요양해 드리는 일을 하고 계신대요. 이 동네에 오신 지는 벌써 3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다음번에 커피 드시러 오세요."
"그럴게요. 일 끝나고 학생 얼굴 보러 가야겠다. 우도 가봤어요?"
"아니요, 아직요."
"내가 우도에서 태어났거든. 시간 되면 내가 관광시켜 줄까?"
우리는 다음 주에 우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서로의 번호를 교환하며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버스가 왔습니다. 제가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도록 다음 환승 정류장까지 안내를 꼭 해주십니다. 우연일까요? 만날 운명이었을까요.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루의 운을 다 쓴 것 같아요. 295번 버스가 고장이 나서 배차간격이 2시간인 것이 우리를 만나기 위하기 위한 하늘의 계획처럼 느껴져서 할머니와의 만남이 신기해서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지네요. 친구가 생기고 있습니다. 바람이 흐르다 만나듯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제주를 꼭 닮은 우정을 나누는 것 같습니다.
벌써 한 달이 되어가네요. 심심함이 찾아왔습니다. 바다를 보고 느끼던 첫 짜릿함은 어느새 잔잔해졌고 새소리만 들리는 동네에 서서히 적응이 되어가니 심심함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 일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때 느끼던 심심함을 어른이 돼서는 외롭다고 느낀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심심하다는 기분을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것 같아요.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같아 나쁘지 않습니다. 심심함을 어떻게 풀어줄까 고민합니다. 미니멀은 사람에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유현준 건축가님의 말씀처럼 제 삶에 공간이 생기는 걸까요. 나는 이 공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달라지는 하늘의 색과 바람, 공기의 감촉은 저를 설레게 해 줍니다. 매일매일이 정말 달랐네요. 이렇듯 매일 다른 모습으로 날 놀라게 해 주는데 자연과 나 사이의 관계에도 익숙함이 찾아올까요? 궁금해집니다.
5화 End.2022.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