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진짜로 남는 것.

by 안 희


3년 전의 제주살이 당시의 기록을 재편집하였습니다.





2022. 10.19. D+50


"하루종일 저녁 메뉴를 생각하다 소라를 버터에 구워 먹었는데 속이 안 좋다. 아마도 맛이 없게 먹어서 그런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맛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다."



울렁거리는 속이 담긴 일기예요. 몸에 좋은 재료들로도 언제나 칼로리를 적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는 식습관이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죠. 이건 독일까요 득일까요? 굶주린 상태에서 허겁지겁 먹거나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한 식사가 문제가 있다는 걸 어째서 몰랐을까요. 갑자기 싱싱한 소라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왜 밥을 먹는 건지, 왜 혼자 먹을 때에는 함께 먹을 때만큼의 만족감이 없는 건지 의아합니다.


겨울이 와 산책을 할 때면 언제나 목적지를 정해 집을 나섰어요. '오늘은 왼쪽으로 가서 저기까지 찍고 돌아와야지.' 경로가 정해진 건 아니지만 목적지가 있기에 겨울이가 더 걷고 싶어 해도 ‘이제 돌아가야 해’라는 명령을 내렸었죠. 분명 이 시간은 겨울이를 위한 산책인데 왜 나를 위한 발걸음으로 채웠는지, 은연중에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합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이렇게 인생을 걸어왔던 것 같아요. 머릿속으로 정해놓은 길을 가거나 가야 한다는 관념이 꽉 차 있었죠. 그래서 현실과의 괴리감이 클수록 불안감과 상실감이 자라났던 것 같아요.



마당에서 딴 애플민트를 음료에 올려주는 사장님의 뒷모습.






다음 날,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따라 메뉴를 정해 요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단정하게 식탁을 차렸어요. 처음으로 혼자서도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적지 없는 산책을 했죠. 목적지 없이 산책 가기. 어떤 냄새가 겨울이를 유혹하는지를 지켜보며 따라가면서 먹으면 안 되는 쓰레기나 자동차 등 위험한 것들로부터 보호만 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겨울이는 충분하게 냄새를 맡고 산책을 즐기다 때가 되니 집으로 돌아오는 냄새를 찾은 것 같이 보였어요.


내 몸과 반려견의 상태가 어떠한지,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어요. ’ 방황하면 내가 힘드니까 이만큼만 딱 걷는 게 적당해 ‘라는 미리 한 걱정과 맛있는 걸 먹으면 살이 찔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내가 만든 미신 아래에 감췄던 거예요. 돌보는 법을 몰랐어요. 지금 나의 기분이 어떠한지, 영양 상태의 불균형은 없는지, 오늘의 피로와 컨디션은 어떤지 말이에요.


유용함에 맞춰 자전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구나. 세상이 만들어준 기준에 맞는 쓸모의 가치에 따라 일상을 끼워 맞추며 살고 있었죠.






2022. 10.21. D+52


'경험'

타지에서 삶을 꾸리는 것, 이 경험 자체가 전부- 일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계속 뭔가를 더 만들어 갈 생각만 했다. 경험은 돈이 아니기에, 당장 쓸 수가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손에 쥐는 걸 만들고 싶어 했다. 나중에 뿌듯해 할 수 있도록, 남은 게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바란 건 내가 느끼기 위함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쇼윈도에 걸 상품이 필요해서였던 거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주에서의 삶 자체가 전부 남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를 살고 알게 되고 보게 되는 모든 것들이 남는 것이었어요. 음식을 음미하고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며 겨울이의 달라진 기분을 알아차리는 것들이 모두 '남는 것'이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잘해야 한다는 의지가 앞서면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특별해지려고 하면 자신을 놓치게 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진짜는 더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 으로의 발견이 아닐까요.




8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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