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의 기록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충동적으로 결정하여 시작한 제주살이 같지만 나름의 굵직한 계획은 있었습니다. 저는 생계형 제주살이인 입니다. 모아놓은 돈으로는 연세만 해결했을 뿐 생활비는 벌겠다고 다짐했었죠. 남은 돈을 쓰면서 휴가를 보낼 수는 없었어요.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는 불안을 일으키는 주범 이니까요. 직거래 플랫폼 '당근'이 제주에서 시작된 걸 알고 계셨나요? 믿거나 말거나 당근을 거래하던 게 발전되어 '당근'이라고 지었대요. 아무튼 본토답게 제주에서는 별의별 것들이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역시 당근을 통해 구할 수 있어요. 사실 얼마 전 '시급이슈'로 이직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밥을 먹는 만큼이나 낭만이 중요한 제게 이곳을 떠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지만 다달이 마이너스를 메꾸어가며 생활하기는 남은 9개월의 기간이 힘들게 보여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제주에서도 생계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씁쓸해서 며칠 동안 흐림이 제 일상에 드리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한 끼의 식사값이 될 수 있는 금액이지만 제게는 불안을 없앨 수 있는 금액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퇴사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저의 치사함이 사장님 눈에는 냉정하게 보였나 봐요. 사장님 역시 삐친 감정을 숨기며 알겠다는 말을 치사한 투로 답하시더군요. 서로가 아쉬움을 숨긴 채 본심을 가린 채 며칠을 보냈습니다.
정말 떠나기 싫었어요. 당근에 올라온 구직의 공간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의욕도 생기지 않는데 출근길은 왜 또 예쁜 건지, 화가 날 만큼 날씨가 좋은 거예요. '이 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퇴근길을 꼭꼭 씹듯이 걸어가던 그 날, '띠링' 버스가 오기 전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사장님이었어요. 계속 같이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투박하게 담긴 진심이 담긴 협상 문자였습니다. 문자를 읽는 데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고민할 새도 없이 협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정도의 지출은 매일 느끼는 기쁨의 값으로 쓰기에 아깝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함께 반걸음씩 다가가기로 했습니다. 제 결정에 사장님은 '좋은 소식'이라며 직원들에게 말을 전했고 다음 날 한 직원은 보자마자 '사랑한다'며 저를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들의 날 것 같은 반응이 당황스러웠어요. 어색한 미소로 답을 했습니다. 그 날 하루 종일 두 사람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내가 이곳에 남기로 한 일이 이렇게나 기쁜 일인지, 사랑한다는 고백을 할 정도인지 의문까지 들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저에게는 이 둘의 마음이 필요 이상의 감정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까요, 웃음이 나는 걸까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에서도 나를 필요로 한다는 기분은 이렇게 좋은 건가 봐요.
이 사건으로 저의 제주살이가 안정적인 시기에 들어온 것 같아요. 소속감,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감정이 따뜻한 방바닥을 만들어 준 것 같아요. 애정결핍이 있던 제가 도시에서 프리랜서로 살면서 채워지지 않았던 바닥 뚫린 마음이 보입니다. 스스로 테이프를 붙이고자 노력했던 시간들이 스칩니다. 일하는 시간 외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음에도 이유 모를 쓸쓸함과 외로움이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조건 없는 사랑을 내어주는 그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이 잠잠한 11월의 어느 날, 좋아하는 빵집에서 산 바게트와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들고 바다로 나갑니다.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눈을 감고 차가운 바람에 눈이 떠지면 해가 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책을 폅니다. 집에 오는 길에는 꽃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주는 그만의 모습으로 아픈 자를 치유해줍니다. 자연을 닮은 사랑으로 좋은 기억들을 만들어 줍니다. 좋은 기억의 힘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분명, 오늘의 '진짜 웃음'이 1년 뒤, 3년 뒤의 우울한 어느 날에 반딧불이 되어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별 것 없는 오늘을 삽니다. 지금의 행복을 꼭꼭 씹어 삼킵니다. 그들에게 받은 사랑이 부디 내 안에 토양이 되어주길, 상처받은 나의 영혼이 옅은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2022.11.06
10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