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초록잎을 품은 가을입니다.

by 안 희



"응? 아직도 60일 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체감상 반년은 더 된 것 같은데 시간이 제 속도를 찾은 걸까요? 도망가는 시간을 잡듯이 지나간 시간을 끄집어내듯이 '벌써 올해도 반이갔어'라는 말을 주고받는 게 익숙했던 도시 생활과는 다르게 이곳에서의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제주의 삶에는 틈이 많습니다. 반면에 선택지가 많이 없지요.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만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외부의 소음이 적습니다. 넷플릭스를 보지 않은지도 60일이 흘렀어요.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사는 것이 이야기가 되고 희로애락 자체거든요.

제주살이를 한지 50일째, 네 번의 눈물을 흘렸더라고요. 지난주에는 전기세 폭탄을 막으려고 당근에서 구입한 버너에 불이 나서 펑펑 울었고 잠들기 전 외로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운 적도 있었죠. 눈물을 닦던 당시에는 후회와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그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평범하던 일상과 달리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만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니 마치 감정의 주인이 된 것 같아요. 세상에, 불이 났다니요. 얼마나 겁이 나고 무섭던지. 긴장감이 풀리면서 동시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공포였죠. 이런 일들을 겪고 나면 주변의 적막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겨울이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드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겨울이가 전해주는 온기에 기대어 잠이 들어요.

어느새 크고 작은 감정들을 맞이하는 게 익숙해졌나 봐요. 전처럼 다가오는 불안과 슬픔을 애써 참거나 괜찮다는 말로 내치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평균의 상태를 강요하지도 않죠. 슬프면 울고 마음이 아프면 찢어지는 대로 아파합니다. 자연스럽게요.


마음이 싱숭생숭한 어느 날에 음악을 들으면서 토마토 절임을 만들었어요. 물을 끓이고 칼집을 낸 토마토를 넣고 보글보글, 땡! 하고 알람이 울리면 일초라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건져내어 양념과 버물버물. 만드는 일에만 집중을 하다보니 마음이 꼭 휴식을 하는 것 처럼 느껴졌어요. 배고픔을 참으며 마침내 완성한 토마토절임을 덜어내어 샌드위치와 함께 아주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음악이 행복감을 방해하는 것 같아 볼륨을 줄이니 마음의 소리가 귓가를 통해 더 선명해집니다. '행복'이란 단어로 그 여운을 설명하기가 부족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자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혜원이의 모습을 부러워하던 내가 실제로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아, 혜원이가 그래서 이 미소를 지었구나' 하며 한 번, 정말 맛있다 하면서 또 한 번, 뿌듯해서 한 번 더. 작은 탄식이 끊이지 않는 식사를 했습니다. 매일 여러 장르의 주인공이 되는 것 같네요.




tempImage0z45vq.heic 바위 틈 사이로.






tempImageO8ZJkb.heic 토마토절임.





2달이 지난 지금, 계획에는 없던 기회가 생겨 서울을 다녀왔어요. 처음 제주를 올 당시 도시탓(?) 을 많이 하던 사람 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풍경이 어떤 기분을 낳게 할지 궁금했어요. 자연이 주는 선물에 익숙해진 눈을 가로막는 아파트가 보이자 실감이 났어요. 하늘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이 새삼 신기해서 한참을 창문에 붙어 있었네요. 설레는 마음으로 내린 김포공항은 예상보다 숨이 턱 막히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다르긴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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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 가기 전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쇼핑몰에 들렸습니다. 정신이 사나워진 건 이때 부터 였어요. 양쪽으로 길게 펼쳐진 좋아보이는 것들이 유혹하기 시작했고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닿기만 하면 원한 적도 없는 것에 욕심이 올라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성이며 바라봤죠. 결국, 그럴거면서. 필요한 것만 사서 나올거면서. 버린 시간을 되돌아보니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마치 깨달음은 얻고 내려오신 스님이 세상에 굴복당한 것처럼요. 자극이 없이 살다 온 탓일까요, 무성의 자극들이 눈을 홀리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어서 서둘러 지하철을 탔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호텔에 들어왔습니다. 바깥으로 보이는 불빛이 방 온도만큼 차갑게 느껴졌어요. 두꺼운 이불에 의존하며 짧게 잘 잠을 청하며 첫날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묵직한 몸을 일으켜 호텔을 나왔습니다. 잠을 포기해서라도 꼭 하고 돌아가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요. 딱 걸린 출근길, 꽉 막힌 도로 위 만원 버스 안에 서서 '서울 버스는 승차감이 부드럽네' 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집니다.

정동에 있는 영화관에 도착 했어요.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거든요. 커피 한잔을 사서 나무에 걸린 단풍잎과 은행잎을 한참을 바라봤어요. 매년 보던 풍경이 다시 새롭게 느껴졌어요. 역시 초록의 가을 보다는 알록달록한 가을의 정서가 아름답네요. '아, 가을같다. 역시 가을은 이 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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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람들은 저를 부러워했어요. 제주살이를 하고 남눈치보지 않고 개성있는 헤어스타일을 하며 사진기를 든 제 모습이 자유롭게 느껴진다 했어요. 많은 호기심을 드러냈죠. 질문이 끊이지 않았어요. 반면에 제 눈에는 그들의 열정이 보였어요. 일에 치우쳐 자신을 잃어가는 차가움이 아닌 꿈이 명확해서 스스로 희생을 선택한 뜨거움이 느껴졌어요. 패딩조끼 하나를 사기 위해 왕복 4시간의 꿀렁이는 도로 위를 달려가지 않아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의시설이 어떤 여유처럼 보였어요. 너무 다른 양 극단의 환경 가운데에 서서 양쪽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쪽은 어디일까? 라고 물었어요. 여전히 표정 없는 사람들이 오고 내리는 지하철 속에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각박하게 보이지만 나 자신을 잃게 만드는 이전의 환경과 달라진 게 없더너 세상 그대로 였지만 다르게 보였어요. 맞아요, 세상은 변한게 없었어요. 달라진 건 오직 나 자신 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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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느 때 처럼 시간에 맞춰 295번 버스를 기다립니다. 이제는 버스 문이 열려도 바로 타지 않습니다. 문이 하나인 버스에 내리시는 어르신들이 있는지 기다립니다. 버스에 오르면 학생들이 없는 걸 보고 '주말이구나' 하며 가장 멀미가 안 날 것 같은 자리를 고릅니다. 일년살기, 제주에서 보낼 시간이 한정적이기에 특별하게 보내야 할 것 같았던 조급함이 서울을 다녀온 이후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매일 같은 시간 버스를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일상이 장기간 머무는 타지인의 특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사합니다. 나에게는 지금의 일상이 특별한 것 이기에 이렇게 잘 지내보기로 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같은 시각,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내립니다. 제주에서 말입니다.






새들은 알을 낳기 위해 둥지를 틀고 동물들은 새끼를 낳기 위해 지붕을 찾아.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는 거야.


집은 그런 곳인 거야,


내가 보호를 받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의 형상이든 말이야.



9화 End.

202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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