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번아웃이 아니었다면?

by 안 희


3년 전의 제주살이 당시의 글을 재편집 하였습니다.




겨울이불을 꺼냈어요. 10월 중순에 '몹시 춥다'라는 말이 나오는 제주예요. 어느새 일과 쉼이 반복되는 일상이 익숙해졌어요. 쉬는 날에는 마음을 먹고 외출을 해요.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넘어갑니다. 이번 주에는 표선에는 없는 베이글을 먹기 위해 섬 반바퀴를 넘어갔어요. 마침내 베이글이 내 앞에 나오면 기도를 드리는 마음 비슷한 게 들어요. 쉽게 얻을 수 없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기분, 만감이 교차하지요.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그림 그리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만 그리면 왜 발부터 나오는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며칠 전, 도서관에서 <내가 사랑하는 화가들>이란 책을 만나 여럿 화가들의 일생을 면밀하게 듣고 새로운 화가들을 알게 되면서 더욱더 갈망은 커져갔죠. 미술은 솔직함을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화가들의 작업이 그랬죠. 자신의 고통을 캔버스라는 한 폭에 압축한 능력에 샘이 났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표현법을 연구하고 그림만 그리는 그들이 부러웠어요. 감동을 받아 바로 화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산책을 하다 우연히 발견했던 단독주택의 화방,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원을 지나면 예술가의 작업실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이 위기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는데 그래서 바로 이곳이다 싶었죠. 첫 수업으로 선 그리기를 하고 두 번째 수업으로 정육면체만 그렸는데 2시간이 지났습니다. 몰입의 종소리, 영혼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네가 찾던 그것이야~'라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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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좋은 날에 퇴근을 하면 집에 있는 일이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어요. 10월 10일, 이 날도 죄를 지은 사람처럼 빨리 생각해내지 않으면 잡힐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서 뭘 해야 재밌을까를 고심, 고심 또 고심하고 있던 순간 친구의 말이 스쳤습니다. 겨울이 와 함께 뚜벅이도 갈 수 있다 했던 오름, 바로 성불오름이예요. 산을 무척 싫어하는 내가 산을 가고자 하다니 대단한데 라는 기특함을 품고 즉각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고 보니 심심함을 느낀 어른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네요.




무심한 하늘이시여, 어찌 제게 이러한 고난을 내리십니까. 어찌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하늘이 검해지는 겁니까. 불안한 마음은 먹구름만큼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설마 했던 비가 내립니다. 정류장에 내리는 동시에 '너도 같이' 내립니다. 번영로에 꼼짝 잡힌 인간과 강아지, 그리고 거미 한 마리가 정류장에 앉아 있는 꼴이 되었죠. 봐도 봐도 소나기처럼 보이지 않지만 소나기이길 바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아시나요. 강아지와 거미는 저의 마음을 알까요. 눈앞에는 쌩쌩 달리는 차들이 듬성듬성 소리를 내며 나를 놀리듯 지나가고 먹구름은 화날 만큼 느릿하게 제 위를 지나고 있는 중에 체온은 불안하게 떨어지는 이 장면이, 정말 재밌었어요. 짜증도 났어요. 억울하기도 했고 추억이다 싶기도 했어요. 이렇게 정신이 정상범위를 지나고 있을 때쯤 비가 그쳤어요. 잽싸게 정류장을 튀어나옵니다. 일단 후퇴를 외치며 반대편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향하는데... 맙소사. 누가 하늘에다 그림을 그리고 갔나 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몇 분을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아요. 다리가 굳어진 것 같았거든요. 겨울이가 깨우지 않았더라면 무지개가 먼저 집으로 갔을지 몰라요. '겨울이도 무지개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같이 고생해 준 겨울이에게 이 기분을 전해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더 고행이었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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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를 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다' 아니고 진짜 '컷트'를 했습니다. 아주아주 짧은 머리를 갖게 되었어요. 10년 동안 배우활동을 하면서 한 번도 머리를 마음대로 해본 적이 없었어요. 언제 어느 역할을 맡게 될지 모른다는 족쇄에 갇혀 살았던 거죠. 배우로서 필요한 태도지만 내면에 있던 강박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주도에 있으니 정말, 신기할 만큼 하고 싶은 걸 더 쉽게 하면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제주도여서 그런 게 아니라 신경 쓸 눈치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겠죠. 난생처음으로 컷트를 하고 거울 앞에 섰는데 정말 별 것 아니었네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린 모습에 기분도 좋았어요. 이렇게 쉬운 걸 '안돼'라는 이상한 믿음에 빠져 살았던 과거의 시간들이 스쳤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렵고 불안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막연한 두려움을 그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어요. 이러한 생각들에 오늘은 우울감이라는 감정이 생생하게 들어왔습니다. 처음으로 이 기분이 우울한 거구나, 내가 지금 우울한 상태구나 라는 걸 바라봤어요.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가만히 바라봤습니다. 친구의 말처럼 나에게 주는 고통과 그 생각이 나 자신 자체가 아니라는 걸 가만히 바라보며 깨지지 않게 조심히 말해줬어요. 생각은 생각 그 자체일 뿐 내가 아니라고, 착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따뜻하게 웃음으로 말해 줬어요.




나는 번아웃 때문에 힘든 게 아니었는지도 몰라요. 번아웃 때문에 제주도로 도망친 게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름 없는 이 고통의 존재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이 불안의 이름을 뭐라 불러야 할까요.






@ Anheestory

7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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