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6권 45.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주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이미 그 모든 일은 선하다. 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한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6권 45 중에서
설거지하다가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나 하나만 괜찮아하면 주위 사람들이 편해질 때, 개인 적인 생각과 마음은 억누르는 게 맞을까? 개개인도 소중하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내 입장을 고수하는 게 맞을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한 철학자가 누구더라 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벤담을 중심으로 하는 19세기 영국 공리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행위가 도덕적 선이라는 의미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이 주장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개인 몇몇의 행복은 조금 이해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개인이 내가 되더라도 그럴 수 있다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반대되는 생각이다.
공동체의 안전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저마다 가진 생각과 마음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너 하나만 괜찮으면 될 텐데.'가 아니라 '네가 괜찮지 않으면 조심할게.'가 되어야 한다.
오늘 문장에서도 말했다.
한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다, 하지만 이때 유익하다는 말은 가치중립적인 일에 적용할 때와 같이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한다고.
가치중립적이란 건 주관적 가치관이나 이해관계를 배제한 객관적인 상태이다.
내 고민에 대해 가까운 이에게 생각을 묻고 토로하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지."란 말로 위로받기도 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건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다수는 괜찮은데 나 혼자만 불편한 상황에서 내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여러 사람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내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님을, 동의를 구하고 행동해야 하는 일임을, 다수는 괜찮아도 한 개인에게는 안 괜찮은 일임을 알아줬으면 했다.
자아가 강해진 걸까.
내 마음이 어떤지 정확히 알고, 외부 상황에 대한 자극에 있어 상대방이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걸 직접 말하지 못하기에 수동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딱 부러지게 논리적으로 할 말 하는 사람이 부럽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한다.
다수가 행복하면 사회전체의 행복이 증진될 수도 있지만 불행한 개인도 많이 없어져야 한다.
살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주어질 테지만 내 생각과 마음만큼은 다수에게 맞춰 깎아내거나 동화시키고 싶지 않다.
누구나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이므로 스스로에게 중요한 가치관을 더 지키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