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기사님에게 배운 삶의 태도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8권 38.

by 안현진

어떤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 "네가 밝은 눈을 가졌다면, 그 눈으로 보고 가장 지혜로운 판단을 내려라."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8권 38.



서울에서 내려오는 저녁 8시 버스를 탔다.

내가 앉은 뒷자리로는 텅 비어 있었고, 승객들도 조용히 잘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깔끔하게 정장을 입은 운전기사님은 앞에 서서 유머 섞인 얘기도 하며 편하게 모시겠단 인사를 했다.

8시 정각이 되어 겉옷을 벗고 운전석에 앉으려는데 마지막으로 타지 않은 승객 한 명이 왔다.

기사님은 웃으며 왜 이렇게 늦게 오시냐고, 뒷자리 아무 곳에 가서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

타고 보니 술 취한 아저씨였다.

맨 뒤에 앉은 아저씨는 차가 출발한 뒤 혼잣말을 하다가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곧 자겠지 싶어 에어팟을 꼈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크게 틀어 놓은 노래를 비집고 들어왔다.

방송도 두 번 나왔지만 계속 전화를 이어나갔다.

앞에 앉은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결국 갓길에 차가 세워지고 불이 환하게 켜졌다.

맨 뒤로 온 기사님은 아저씨에게 단호하지만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왜 고속도로에서 위험하게 차 세우고 왔는지 아시겠지요? 지금 바로 전화 끊어주세요. 다시 시끄럽게 하시면 그땐 경찰서로 갑니다."

그 뒤로 버스 안은 조용해졌고 나도 잠에 빠져들었다.

휴게소에 들렀을 때도 기사님은 내리는 아저씨에게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했다.

다시 버스에 오를 땐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묻고, 안전벨트도 맸는지 확인했다.

불편할 법도 한데 끝까지 정중한 태도였다.

버스 운전을 하며 얼마나 다양한 손님들을 만날까.

처음에는 '저 한 사람만 안 탔어도 조용히 갈 수 있었을 텐데...' 아저씨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기사님은 탓보다는 상황을 정리하는 책임감을 보여주었다.

단정한 복장과 점잖은 인사, 승객의 편리와 안전을 챙기는 모습에서 직업의식이 엿보였다.

기사님을 보며 《절제 수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스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에파미논다스에게 테베의 하수구를 책임지는 일이 맡겨졌다.

그의 뛰어난 능력을 시기한 경쟁자들이 에파미논다스의 경력을 끝내버리기 위해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노나 절망 대신 새로운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며 '직책이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책을 특별하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이야기에서 라이언 홀리데이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사님의 태도로 버스 운전이라는 일과 운전기사라는 직업이 다르게 보였다.

직업, 재산 규모, 겉모습을 보며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말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까지 품위가 있다 말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다.

내 일에 있어서는 작게 보이는 일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싶어도 끝까지 책임지기.

내가 하는 일을 빛나게 하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나 자신이다.

그날 밤, 내가 버스 기사님에게 배운 삶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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