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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진 Apr 23. 2024

선과 악, 미덕과 악덕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9권 16.

이성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의 선과 악은 그들이 겪는 일들에 있지 않고 행하는 일들에 있다. 이것은 그들의 미덕과 악덕이 그들이 겪는 일들에 있지 않고 행하는 일들에 있는 것과 같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9권 16.



윤우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 뜨니 저녁 6시가 넘어간다.

은서만 재우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얼마나 잔 건지 모르겠다.

거실로 나오니 선우가 엄마 많이 잤다고 한다.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은서랑 잠든 사이 선우가 집안일을 많이 해놨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고,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까지 해놓았다.

자기 옷과 수건은 개어서 넣어놨는데 엄마, 아빠 옷은 커서 잘 못 개갰다고 두었다고 말한다.

일반 쓰레기는 묶어야 하는데 어떻게 했냐니까 자기가 조금 묶어서 테이프로 붙였다고 한다.

수건은 바깥 화장실에 들어갈 곳이 없어 안방 화장실에 넣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윤우를 씻으러 보냈다고 한다.

어리둥절한 채 선우 얘기를 듣다가 점점 놀라움으로 번져갔다.

집안일이 아무리 가족 공동의 일이고 함께 하는 게 당연한 거라 해도 열 살 남자아이가 스스로 했다기엔 너무나 기특했다.


남편은 어린 시절 기억이 많이 없다고 한다.

나는 6~7살도 어렴풋이 떠오르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는 모두 기억난다.

물론 세세하게 전부를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큼직큼직하게 있었던 일, 그때의 감정이 남아있다.

열 살, 아홉 살 아들이 내게는 여전히 어리게 보이는데 그땐 내가 꽤 큰아이처럼 느껴졌었다.

지금 선우 나이일 때 나를 떠올려 보면 부모님을 비롯해 가족,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내가 가진 돈 안에서 선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게 있었다.

그 선한 마음, 나도 가져봤기에 안다.

지금 선우가 어릴 때 내 모습 같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뭐라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 기쁘게 해주고 싶은 그 마음은 안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때 난 왜 그랬을까 하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을 곱씹어 본다. 어린 시절과 성장기의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나는 내 안의 순수한 감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걸.’

작년에 출간한 세 번째 에세이 《소신대로 살겠습니다》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실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선과 악, 미덕과 악덕은 내가 겪는 일보다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있다고 한다.

선우가 행한 건 미덕이고 선이다.

나는 그 선과 미덕을 받았다.

아이들이 선하고 고운 마음을 가지고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엄마가 행하는 미덕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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