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공자_제3편 팔일(八佾) 24.
의 땅의 관리가 뵙기를 청하며 말했다. "군자께서 이곳에 오시면 내가 만나뵙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공자를 모시던 제자들이 뵙도록 안내해 주었더니, 뵙고 나와서 말하였다. "그대들은 어째서 공자께서 벼슬이 없으심을 걱정하십니까? 천하의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늘이 앞으로 선생님을 세상의 목탁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논어》, 공자_제3편 팔일(八佾) 24.
남편이 어제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물었다.
전날 밤 [나도 선배처럼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카톡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앞두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온 신경이 그쪽으로 다 쏠려 있다.
무얼 하든 마음이 편하지 않고 그것 하나에 꽂혀 계속 준비하는 것이다.
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말이다.
최근에는 수업하는 일이 그랬다.
'수업이 너무 재밌다고 해요.', '매일 가고 싶대요.'라는 말이 달콤해서 더 준비하게 된다.
어제 수업한 아이는 책 읽는 것을 안 좋아했는데 책도 재밌고 책 읽는 것도 재밌었다고 말해서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근무는 근무대로, 강의는 강의대로 무던히 해내는 남편처럼 나도 유연하게 내 일을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수업이 있던 전날 밤 근무 중인 남편에게 카톡을 남겼었다.
남편은 아니라고, 자신도 강의 앞두고 엄청 신경 쓰이고 예민해진다고 말했다.
표가 안 나서 몰랐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나눠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준비하면 대충 할 수가 없고 신경 안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수업을 준비하는 내 마음도 그랬다.
반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으로서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준비한 걸 다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놓치고 가는 게 있지 않을까.
완벽한 수업보다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아이들 말에 더 귀 기울이고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목탁은 자신이 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에만 울리고, 소리 낸 뒤에는 울림이 남는다.
목탁이 울리는 순간은 수업의 방향이고, 뒤에 남는 울림은 수업의 여백이라 할 수 있다.
내가 할 일은 목탁을 울리는 것까지다.
수업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되 나머지 여백은 아이들이 채울 수 있도록 나와 학생에 대한 유연함을 잊지 않아야겠다.
나의 작은 목탁 소리가 아이들 안에서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리라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