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공자_제4편 리인(里仁) 13.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禮)와 겸양으로 일을 대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예(禮)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예는 있어 무엇하겠는가?"
-《논어》, 공자_제4편 리인(里仁) 13.
"너 엄청 시크하다~ 왜 이렇게 쿨해?"
선우를 처음 본 사람이 말했다.
잘 웃지도 않고, 묻는 말에 "뭐가요?"라고 되묻고, 말투에서 느껴지는 건조함 때문일 거라 짐작한다.
남편과 나는 선우가 시크해서가 아니라 아이 나름의 긴장과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임을 이해한다.
윤우는 형과 다르게 말투부터 애교가 뚝뚝 묻어난다.
원래 귀염스러운 것도 있지만 낯선 이를 대하는 윤우만의 긴장 완화와 친해지려는 노력이다.
부모이기에 알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다.
요즘 ‘예의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책과 부모의 행동을 통해서 예의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직접 보고 느끼는 것 말고도 표현의 방법을 잘 알려줘야겠다고 느낀다.
누구보다도 공감 잘하고 눈물 많은 첫째를 시크하다 말하는 것처럼 마음은 안 그럴지라도 표현하는 것에 따라 상대가 오해할 수 있다.
셋 중 평균 기상시간이 가장 빠른 윤우가 오늘도 제일 먼저 문을 빼꼼히 연다.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조용하던 시간은 은서가 온 지 5분도 안되어 깨졌다.
어떤 말이었는지 오빠의 장난스러운 말에 은서가 크게 소리친다.
쿵쾅거리며 걸어간다.
한숨이 나왔다.
아이 행동이 다른 집에 피해가 갈뿐더러 왜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을까, 화날 때마다 저렇게 소리쳐야 할까, 윤우는 왜 자꾸 은서가 싫어하는 말을 할까.
아이들 모습을 보면 내가 강압적으로 말하거나 명령조로 얘기하나? 표현을 잘 못하는 엄마인가? 생각하게 된다.
예의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만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형제, 친구, 어느 곳에서나 존재해야 한다.
나와 타인을 위해서다.
어른 사회에서도 크게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다, 묘하게 마음 상하는걸.' 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대의 마음은 없고, 예의라는 형식만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형제간에도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밖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행동할 줄 알 것이다.
이제 ‘예의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고민은 '어떻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게 가르칠 것인가'로 바뀐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이 담긴 예를 실천하는 사람인가.
가르친다는 건 이렇게 늘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티격태격하는 아이들을 중재하는 내 모습이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