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백마 탄 선생님을 꿈꾸곤 했다.
공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마를 타고 달려와 공주를 위기에서부터 구해주는 그런 왕자님 같은 선생님을 말이다. 내 소망이 무상하게, 현실은 내가 그린 꿈을 실현해 주지 못했다.
현실에 백마 탄 왕자님이 없는 것처럼, 백마 탄 선생님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에 존재했던 건, 내 뺨을 때리고 호통치는 신데렐라의 계모 같은 사람뿐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싫다. 학창 시절 내가 만난 그들은, 동화 속 계모였다.
내 뺨을 때리고, 뒤통수를 후려쳤다. 왜 말을 듣지 않냐고 호통쳤다.
나는 핍박 받는 신데렐라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때론, 그들은 동화 속 마녀였다. 그들은 내게 종종 마술을 부리곤 했다.
아주 무시무시하고도 끔찍한 마술이었다. 나를 투명 인간으로 만드는 마술이었다.
그 마술을 사용하면, 내가 그들 앞에 서 있어도,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내가 말을 걸어도,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 지독한 마술에 지쳐서 눈물을 흘렸을 때야, 그들은 웃으면서 마술을 풀어주었다.
그 순간부터 내 안에서 ‘선생’이라는 단어를 회생 불가할 정도로 잘게 해체해 버린 후 지웠다.
‘선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계모 혹은 마녀뿐이다.
동화 속 신데렐라는 백마 탄 왕자님이 구해주었고, 공주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 속 신데렐라는 공주가 될 수 없었다.
현실에 백마 탄 왕자가 존재하지 않기에, 신데렐라는 공주가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바뀐 것은 없다.
단지, 이야기의 진행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데렐라가 학창 시절이라는 그 시간으로부터 도망치듯이 쫓겨났을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일에 관해 무감각해졌다.
과거란, 이미 지나간 일이며, 그것을 끌어안고 있다면 곪기 마련이다.
학창 시절은 분명 과거의 일이고, 현재의 일은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학창 시절 만나는 사람 중,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내 경우가 세상 모든 표본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 이성은 그렇게 큰 목소리로 내게 피력한다.
그런 이성과는 반대로, 감성은 내게 자꾸만 속삭인다.
하지만, 네 인생의 표본 중 네가 겪은 표본은 하나뿐이고, 그 표본이 네 인생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여전히 과거의 너는 그 시간 속에서 홀로 앓고 있고, 그 시간의 너를 위로해 줄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과거니깐.
그렇게 감성은 이성적 사고가 내린 결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어쩌면, 지금 내가 느끼는 무감각이란 감정은, 더는 닳아 없어질 것이 남아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 나는 백마 탄 선생님을 기대했지만,
내가 몸소 느낀 ‘선생’은, 選(가릴 선). 生(날 생). 사람을 가리고 분별하는 감별사였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내 옆인 이쪽. 공부 못하는 사람은 저쪽.
고분고분한 사람은 이쪽. 고분고분하지 못한 사람은 저쪽.
본인 맘에 드는 사람은 이쪽. 본인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저쪽.
이쪽. 저쪽. 그들은 공장 트레일러에서 불량품을 솎아내듯이 사람을 솎아냈다.
그리고 ‘나’는 불량품이었다. 솎아낸 후에는 종류별로 모아서 분류한 다음에 장벽을 세웠다.
장벽 안의 존재들은 아늑한 곳에서 따뜻하게 지냈지만, 장벽 밖의 나는 구박과 핍박을 받아야 했다.
장벽 밖으로 쫓겨난 나는 매 순간 생각했다. 선생이란 무엇일까.
先(먼저 선) 生(날 생). 생을 앞서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먼저 살아간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그렇다면, ‘먼저’,라는 그 말이 그들에게 우월감을 준 것일까.
선생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단순 교육부에서 지정한 내용만을 가르치는 걸 ‘선생’이라 하고, ‘교육’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가.
장벽 밖으로 쫓겨난 내게, ‘교육’이자 수업 중 기억나는 부분에 대해 묻는다면,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무시’뿐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장벽이 쌓여있었고, 내게 그 장벽의 문을 열 열쇠는 없었다.
오늘 할 진도에 대해 말하고, 진도를 나간다. 내일도, 진도를 나간다. 모레도 또 진도를 나간다.
수업에 관한 내용. 끝. 그뿐이었다. 수업은 ‘학생’과 ‘선생’ 둘이 이루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학생’인 나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수업이라는 시간은 계모이자 마녀의 주도하에 1부터 10까지 이루어졌다.
위에서 명령을 내리면, 아래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그런 구조였다.
선생은 명령을 하달하고, 학생은 수행한다.
그 구조가 수업 진행은 수월했을 것이다.
이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를 상하관계로 구분 지어 놓은 수업이다.
학생과 선생의 관계는 선생이 위에 있고, 학생은 밑에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기에, ‘먼저’. 라는 그 말이 상하관계를 의미하기 위한 의미로 사용되어선 안 되며,
수업도 그런 구조로 진행되어선 안 된다.
선생이라는 직업은, 나비효과이다. 선생의 작은 날갯짓 하나에, 학생들은 폭풍을 맞이한다.
선생에게 학생은 수십, 수백 명의 사람 중 하나지만, 학생에게는 단 한 명의 선생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 사실을 망각했다.
선생도, 학생도, 서로의 날갯짓에 의해, 폭풍을 맞이하고, 아픔을 겪는다.
그 폭풍을 벗어나기엔, 온 힘을 써야 한다.
나도 그 폭풍을 뚫는 사이에, 내 몸을 내 손으로 깎아내는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그 비바람 속에서 나는 내가 선망하던 ‘선생’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빚어낼 수 있었다.
선생은, 宣 (베풀 선). 省(살필 생). 베풀고 살피다.
학생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그들을 살핀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내가 그리던 백마 탄 선생님이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 중 하나는 바로 ‘소통’이다.
‘학생’과 ‘선생’ 그 이전에 두 명은 ‘사람’과 ‘사람’이다.
서로 ‘소통’을 하고, 알아가며 같이 배워간다. 둘은 때론 의지하면서, 때론 도와가는 동행자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관계가 아닌, 때론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그런 존재.
그리고 먼저 길을 나아간 사람으로서, 그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의 선택지를 보다 많이 제시해 주고,
고민이 있다면 같이 고민해 주는 그런 사람.
그것이 구박 속에서 내가 누구보다 기다리며 그려온 백마 탄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만약 다시 ‘선생’이라는 단어를 조립할 날이 오게 된다면, 宣 (베풀 선). 省(살필 생).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하지만 어렴풋이 나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다.
백마 탄 왕자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듯이,
‘만약’이라는 세계에서 내가 항상 그려왔던 선생님의 모습은, 내 꿈속에서만 살아 숨 쉴 테니.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담아둘 뿐이다. 과거의 일도. 지금의 일도. 미래의 일도.
내 인생에 백마 탄 선생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