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고 싶다.
살랑바람처럼 갑작스레 불어온 그 마음에 이끌려, 이렇게 글을 써내려 갑니다.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에 홀려 글자를 하나둘 새겨가지만,
수신인을 누구로 정할 진 편지를 쓰는 지금도 갈피가 잡히지 않네요.
이 편지는 누구에게 보내기 위해 쓰는 편지일까요.
독자분께 쓰는 편지일까요. 지인을 위해 쓰는 편지일까요.
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10년 후의 제 자신을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네요.
누구를 위해 이 편지를 적어 내려가는지는 흐릿하지만,
이 편지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흘러 내려가 그 모두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만큼은 뚜렷합니다.
이 편지를 유리병 안에 담아 푸른 바다에 살포시 떠내려 보냅니다.
모두에게 이 편지가 제대로 전해질지 모르겠네요. 파도만이 그 진실을 알겠죠.
그렇다고, 전해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단념하고 마음을 접어버린다면,
그만큼 슬픈 일도 없겠거니 싶어 이렇게 편지를 한 글자씩 써 담습니다.
편지라는 말에 의문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편지는 언제였을까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동상처럼 곰곰이 사색에 잠겨봅니다.
꼬꼬마 시절 부모님께 썼던, 어버이날 감사 편지였을까요.
스승의 날 꽃다발 사이에 껴 넣었던 흔해 빠진 낱말을 늘어놓은 편지였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저의 마지막은 군대에서 부모님께 쓰는 편지였던 것 같네요.
이리 기억을 더듬어가니, 제가 편지를 쓴 횟수가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에겐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편지가 당연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편지라는 단어의 의미에 특별함이 담겨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입장, 그리고 세상.
이 편지도 보는 그 순간에는 특별함을 느끼겠지만, 시간이 지나서 본다면, 그 특별함은 서서히 흐릿해지겠죠. 제 말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겁니다.
그래도, 어느 날 문득, 다시 한번 이 편지를 집어 들었을 때,
과거의 그 향을 맡을 수 있길 바라며, 지금 순간만의 향을 담고자 합니다.
순간의 향을 담기 위해, 편지의 다음 말을 이어가기 위해,
제 안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더듬어갑니다.
편지를 이어가며 한 글자 한 글자. 그동안 담지 못했던 말들을 담아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편지의 문장이란 길을 걸어가는 매 순간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편지란 신비로운 존재 같습니다.
글을 써내려 가기 전엔 몰랐습니다.
제 안에서 자신을 펼쳐지지 못하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말들이,
방치되어 먼지가 쌓인 편지의 모습을 한 채로 마음 구석에 한가득이나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편지 위에 쌓인 먼지를 훌훌 털어내며 하나둘 모아서 제목을 확인했습니다.
갈 길 잃은 편지의 제목들은, 제 안에 응어리가 되어 있던 그 말들은,
순간을 놓쳐 입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버린 말들이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말이라는 게 항상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그 시간을 지나면 하지 못하게 되는 말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제가 알고 싶다고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알게 되고 말았습니다. 몰아치는 후회와 함께.
말이란, 그 순간에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그 순간을 놓치면 입 안에서 맴돌아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말이란 그런 것입니다.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응어리가 되는 존재.
응어리가 된 마음들은, 제 심장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채로 차갑게 굳어버렸습니다.
응어리가 된 마음으로 뒤덮인 심장이 한번 심박동 할 때마다,
심장을 통해 후회와 미련이 혈류를 타고 흐르며 온몸을 누볐습니다.
미련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그동안 숨겨왔던 마음을 전하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결심을 맺었지만, 문득 고개를 치켜든 망설임이 제 마음을 가로막았습니다.
망설임은 항상 제 발목을 붙잡았죠.
우체통에 편지를 넣기만 하면 되는 순간, 망설임은 마음을 흔들었고 편지를 보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한걸음만 내딛으면 상대에게 닿을 수 있는 마음을, 그 자리에 묶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쌓여 간 후회와 미련, 그에 사무쳐 포기해 버린 순간들이 먼지 쌓인 편지를 만들어낸 것이겠죠.
후회와 미련 속에 파묻혀 지내온 세월이 하나둘 쌓여, 전하기엔 너무 늦었으려나 싶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미 늦었다는 포기의 마음이자 먼지 쌓인 편지는, 다시 후회와 미련을 만들었습니다.
후회와 미련은 보내지 못한 편지를 만들고, 보내지 못한 편지는 다시 후회와 미련을 만들고.
끊이지 않는 악순환은 계속되고, 후회의 굴레는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품고만 있던 마음을,
둥지에서 떠나보내 하늘을 향해 훨훨 날려 보냅니다.
보내지 못하고 쌓아두기만 했던 편지를, 이제는 당신에게 보냅니다.
이미 늦었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더라도, 더는 늦지 않고자 이제는 전하려 합니다.
이 편지를 집어든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들을.
항상 당신에게 미안했음을.
매일 당신에게 고마웠음을.
매 순간 당신을 사랑했음을.
그동안 숨기듯 감춰왔던 말을 전한 지금.
이 간단한 말들을 전하기가 왜 이리 어려웠던 것인지, 부끄럽기만 하네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그런 후회도 듭니다.
이런 후회가 생기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세상이 상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특별해진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 특별해지고 있는 세상이 되어 가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전하는 일이 특별해진 세상이라니. 그런 쓸쓸한 상황에 씁쓸함이 마음에 들어찹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투명한 마음을 내비친 순간은 언제일까요.
이 편지를 집어든 당신의 안에도,
아직 보내지 못한 편지가 마음 한구석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겠죠.
마음은 품기만 해서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지가 쌓이기 전까진 투명했던 마음들을 지금이라도 전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버겁다면, 지금까지 보내지 못했던 편지들을 서랍에서 꺼내서 분류해 보는 일부터요.
그리고 언젠가, 준비가 된다면 그 순간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하나둘 품에서 날려 보내도록 하죠.
상대를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전해지지 못하는 세상은,
그것만큼이나 슬픈 세상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깐요.
그 말이 제가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이 편지를 집어든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