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대한 경계

by 아니아즈



경계선 위에 내가 서 있는 장면을 머리에서 상상으로 그려보았다.

그 경계선은 남한과 북한 사이에 있는 경계선이다.



그 경계선을 기준으로 오른발은 남한에, 왼발은 북한에 두고 서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남한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북한에 있는 것일까.

남한인이 되는 것일까. 북한인이 되는 것일까.

탈북인가. 탈남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러 망상들을 물밀듯이 터져 나오는 상상력을 토대로 호기롭게 그려내었다.

그런 다채롭게 펼쳐지는 장면들의 마지막 장면은, 무엇보다도 또렷한 결말이 하나 있었다.





아마 총에 맞을 것이다.

탕 소리를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질 것이다.

남한으로도, 북한으로도, 그 어느 쪽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기에.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었다.



슬픔과 기쁨. 빛과 어둠. 남과 북.

세상을 둘로 나누고, 서로를 배척한다.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고 서로를 배척하지만, 둘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명백히 존재한다.


빛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한다.

빛이 있기에 어둠에 의미가 생기고, 다시 어둠이 있기에 빛에 의미가 생길 수 있다.

슬픔과 기쁨도 그렇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의 의미가 돋보일 수 있고, 다시 기쁨이 있기에 슬픔의 의미가 커진다.


이렇듯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는 세상의 존재는,

상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본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분법 세상은 상대의 파멸은 곧 자신 존재 의의의 파멸로 직결되기에,

상대의 파멸을 원하면서도 완전한 파멸은 원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욕망은 다른 쪽에게로 발산된다.

다른 쪽이란, 이분법적 세상에서 어느 한쪽에도 속해 있지 않기를 선택한 존재이다.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는 세상 외의 존재 또한 분명 존재한다.

둘 사이에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은 존재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빛과 어둠, 생과 사, 슬픔과 기쁨. 남과 북. 자본화된 세상과 자본화되지 않은 세상. 선과 악.

그 사이를 지칭하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을뿐더러,

이분법적 세상을 지속해 나가는데, 그들의 필요성은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란, 무언가를 그 ‘이름’ 안에 가두는 행위이자,
그 안에 소속시키는 행위이다.



어떤 존재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 그 대상은 ‘이름’이 보여주는 특성이란 굴레에 속박되어진다.

그런 연유로, 이분법적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들은 ‘이름’으로 속박할 수 없다.

하나의 ‘이름’ 안에 담기길 거부했기에. 하나의 ‘세상’으로 규정할 수 없기에.


‘이름’이 없다는 사실, 경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양측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받는다.

외면과 핍박, 그 끝에는 삶과 죽음, 그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하게 되고,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된다.

‘이름’ 없는 존재는 하나둘 사라져 가고,

그들이 하나둘 사라져 갈수록, 이분법적 세상의 울타리는 하나둘 더 높이 쌓아 올려지고 더욱 견고해진다.




이분법의 세상이 하나가 될 방안은,

한쪽의 파멸이 아니라, 두 존재의 융합이다.



융합이 가능케 하는 존재가, ‘이름’ 없는 존재들이자, 경계선 사이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빛과 어둠이라는 정반대인 존재의 경계선 사이에서, 그들은 다리의 역할을 한다.


‘이름’이 없는 그들은, 빛과 어둠 그 중간의 무언가가 되어,

빛과 어둠이라는 두 존재가, 서로 섞여 하나의 존재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예술, 노래, 그림, 소설 등의 형태를 빌려, 그들은 끊어진 선을 잇는다.

그리고 현재는, 하나가 될 그 가능성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이름’ 없는 존재가 하나둘 사라져 감에 따라, 이분법 세상의 벽 또한 하나둘 쌓아 올려지고 있다.

그에 불안감을 느껴 이분법 세상의 벽이 더욱 높아져 어디로 소속되지 못하기 전에,

‘이름’ 없는 존재 또한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이분법 세상에 속하길 선택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이런 상황에 무언가를 품고 본인이 이분법 세상에서 경계선에 남기로 선택했다면,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그쳐선 안 된다.

본인이 경계선에 있기를 선택했다면, 그 사실에 대한 경계를 일분일초도 멈추지 않고 자각해야 한다.


경계선에 서 있다. 중립이다. 떨어져 있는 두 존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단순히 보았을 때, 이 말이 뿜어내는 향기는 달콤해 보인다.

만약, 단순히 달콤한 향에 끌려 그것을 입 안으로 넣는다면,

달콤한 향의 뒤에 숨어 있는 그 안의 독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들이킬 수 있다.




중립이란, 가장 아름다운 이름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중립은 방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본인의 일이 아니라고,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작디작은 세상 속에서 질식해갈 수 있다.


중립은 언제든지 다른 쪽으로 변화할 수 있다.

한쪽이 더 우세해졌을 때, 그쪽에 합세하여 그들의 ‘이름’을 자신에게 떡하니 붙이고,

그 ‘이름’이 처음부터 본인의 것이었던 냥 행동할 수 있다.


본인이 경계선 사이에 서 있기를 자처했다면, 끝없이 본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도록. 어느 한쪽에 물들지 않도록. ‘이름’을 가지지 않도록.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경계선에 있기를 선택했다면, 당신에게 ‘이름’은 없을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기억될 ‘이름’이 없다는 얘기며, 기억될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되지 못한다면 어떠한가.

그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현재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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