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털, 짙은 역사, 그리고 그들을 유전 받은 나

by 아니아즈


나는 짙은 털을 유전받았다.



턱수염, 팔 털, 눈썹, 머리털 등 온몸의 털이 진한 편이기에,

학창 시절에 송충이 눈썹과 같은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별명도 내가 유전받은 것도 어렸을 때는 싫었다.

하지만 유전받은 걸, 내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것을 내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유전받은 이상, 이미 그것은 내 일부였다.




어렸을 때는 내가 유전받은 짙은 털이 싫었지만, 요즘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나와 같이 짙은 털을 가진, 친척들을 보면서 하나의 감사함을 느꼈다.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인, 탈모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내려놓아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였다.



같은 것을 유전받지만, 다른 방식으로 유전받은 것을 바라볼 수 있다.

송충이 눈썹이라는 부정적 부분의 의지를 계승할 수도 있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는 긍정적 부분의 의지를 계승할 수도 있다.





유전받는 것은 같을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의지의 계승은 다르다.





우리는 많은 걸 유전받는다. 심지어는 폭력성 또한 유전받는다고 한다.

사람의 폭력성은 유전적 영향 또한 있다고 하지만, 유전적 영향만으로 사람을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본성뿐 아니라, 이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성이란 폭력성이 유전이라면, 이성이란 의지는 계승이다.

폭력성이란 본성을 유전받는다고 하더라도, 계승받은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외형뿐 아니라 감정도 유전받는다.

그 외에도 우리는 '역사' 또한 유전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유전 받은 역사는 '폭력'이 짙게 새겨진 역사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유전받았다.




그 시대를 직접 살지 않았어도, 우리의 언어, 문화, 정체성, 심지어 우리의 ‘감정’에 이르기까지,
그 억압의 시대는 우리 몸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그로부터 우리가 유전받은 감정 중 가장 선명한 것은 ‘증오’였다.
빼앗긴 땅, 훼손된 언어, 강요된 이름, 짓밟힌 존엄.
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상처는 세대를 넘어 증오라는 의지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 증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았다.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그들에 대해 배척한다.

같은 민족 안에서도, 서로를 낙인찍고, 또 어떤 이들은 그 낙인을 빌미로 새로운 폭력을 휘두른다.
이질적인 존재를 향한 혐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 대한 적대감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증오의 유전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이 '증오의 유전'이란 역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역사를 쓰는 펜은 증오라는 피가 묻은 손에서, 그들의 의지를 계승한 자손의 손으로 전해진다.

그들의 자손들은 증오라는 붉은 잉크를 묻힌 펜을 들고,

본인의 손으로 앞선 역사를 책의 빈 페이지에 되풀이한다.

그렇게, 증오는 유전된다.

이런 유전과 계승이 반복된 세상의 끝은, 증오와 상처만이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우리가 유전받은 역사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경각심’을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증오’를 계승할 것인가.

증오가 남긴 상처는 깊지만, 그 감정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으로는 다시 ‘상처를 재생산’할 뿐이다.
그러나 '경각심'은 그 상처를 잊지 않되,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한 이성의 선택이다.

우리는 분명 같은 역사를 유전받았다. 우리가 유전받은 것을 부정한다고 유전받은 것이 바뀌지 않는다.

이미 유전받은 것은 긍정하든, 부정하든 내 일부이며, 내 안에 스며들어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선 안 되고, 이 사실을 유전하고, 이 의지를 계승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유전받은 것의 어떤 부분을 계승할 것인가. 이 또한 계승해야 한다.


증오의 의지인지. 경각심의 의지인지.

우리가 무엇을 계승하는지에 따라, 역사는 또다시 유전되고, 계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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