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물과 같이
지인이 표가 생겼으니 영화를 보자고 했다. 최근 개봉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보자고 했는데, 마침 나도 조금 궁금했던 영화여서 함께 보기로 했다. 부랴부랴 검색을 해 보았더니,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였다.
[판의 미로]에서처럼 놀라운 괴물을 만들어낸 걸까. 무서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 정도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이 배경이라면 아주 예전에 재밌게 보았던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 같은 영화는 아닐까, 조금은 기대하게 되었다.
사실 난 사랑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다. 게다가 [셰이프 오브 워터]라는 제목은 흥미를 유발했지만, 원제에는 딸려있지 않은 '사랑의 모양'이라는 한국어 부제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원제에도 '형태/모양'이라는 뜻의 단어가 들어있는데, '모양'이라는 걸 굳이 한번 더 적었어야 했을까.
이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개봉일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감상이 끝나고 지인에게 내가 고민 끝에 한 말은 "재미있었어요"였다. 이런저런 점들을 다 체크해보았을 때,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은 조화로움이 있었다.
생각보다 사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 영화였다.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는 아마, 이것이 사랑 영화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 달아놓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존재(더그 존스)와 수화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달걀을 먹여 보살피는, 상처 입은 존재에 대한 동정, 살아있지만 박해받는 한 생명에 대한 응원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설마, 이종(異種) 간의 사랑을 그릴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 영화 특유의 달달하고 로맨틱한 감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영화 초반에는 새로운 괴물을 조금 두려워하고 몰래 관찰하느라 그 사랑스러움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웠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좋았다. 관객들은 저 존재가 무엇인지 아직 알고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주인공들끼리는 아주 빠르게 감정이 싹튼다. 정신차려보니 사랑이었다. 두 존재는 이 감정이 사랑임을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들인다.
글을 쓰다 보니 떠오른 것이 있다. 그 남미에서 잡혀온 존재는 끝까지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어도, 부르지 않아도, 무성영화처럼, 대사가 없는 애니메이션처럼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다니 멋진 일이다. 생각해보니 말과 목소리로 소통하지 않는 엘라이자와 그 존재에게 서로 이름은 필요 없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름은 어떤 존재에 대한 규정이다. 그들의 사랑이 물의 성질과 비슷하다면, 서로를 이름으로, 종(種)으로, 외관으로 상대를 규정하지 않은 채 사랑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랑의 모양들도 나온다. 영화 속 성소수자, 흑인, 농아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서로를 아끼고 연대하여 영화의 구조와 내용상 거의 절대악과 같아 보이는 존재에 저항한다. 가난하고 외롭지만 인간답게 살기 위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여기에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는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재미를 더한다. 어느 시대에나 사랑은 있었지만, 그 흔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백인이나 이성애자나 부자나 비장애인 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얻기 위해 조금은 물과 같이, 그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의 외관이나 형태에 관해서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들이 타인의 사랑에도 그 어떤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유연하고 관대한 시선으로 응원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