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텀블러
올해 초 8년 만에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뉴욕 건축 투어를 다녀왔다. 기본 비용만 해도 상당했기에 쇼핑은 자제하리라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대학교 4학년 시절 처음으로 떠났던 장기 유럽 여행에서는 아직 나의 소비 습관이나 취향을 잘 몰랐기에 쓰지도 않을 물건을 잔뜩 사 오는 실수를 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먹어서 없어지는 것들과 뉴욕을 기억할 수 있는 마그넷 또는 오브제 한두 개 정도만 담아오리라 되뇌었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지난 8년간 사지 않는 것에 대한 기준을 차곡차곡 쌓아온 것은 맞으나, 그에 대한 반발로 제외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구매 한도가 사라지는 이상한 변수도 어디선가 자라났다. 그렇게 뉴욕 여행을 함께한 동생들은 여행 중반쯤 "누나/언니, 또 뭐 샀어요?"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통칭 기념품으로 묶어 부른 나의 욕망의 소비 리스트는 주로 장식품이나 오브제다. 뉴욕 스카이라인을 딴 자석과 배경 액자, 브루클린 브리지가 그려진 아크릴 거울, 자유의 여신상 레고와 마그넷 등이다. 유일하게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911 메모리얼에서 산 텀블러다.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는데 집합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멍하니 의자에 앉아 다리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5분 남짓 남았을 때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더니 그 끝에 기념품샵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뿔싸. 전시 기념품을 생각하지 못했다니. 빠르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인원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쇼핑장으로 달려갔다. 끝까지 둘러볼 시간이 부족해 초조했는데, 가게 중앙 카운터 앞쪽의 투명한 파란빛이 눈을 끌었다. 한 손으로 집으며 계산대로 향했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파란 유리 텀블러가 영롱했다. 뉴욕을 잘 보여주고, 의미도 있고, 실용성도 있는 아주 완벽한 쇼핑이었다. 하지만 남은 여행 기간 텀블러를 들고 다닌 건 그날 하루뿐이었다. 유리.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투어에서 550ml 유리 텀블러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자주 챙겼다. 텀블러를 들고 걷는 건 하루 30분 남짓이기에 무거운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길이 닿는 만큼 텀블러의 프린팅에 조금씩 긁힌 자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까운 마음에 평소에는 넣어두고 만만한 플라스틱 텀블러만 집었다. '오늘은 왠지 이 녀석과 외출하고 싶어!'라는 마음이 들 때만 찾게 되었다. 그렇게 반년이 넘게 지났다.
매일 쓰기를 하며 집에 있는 물건을 찬찬히 살펴보다 찬장에만 놓여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보면 기분이 좋아서 샀으면서 왜 나는 눈길을 주지 않고 있는 거지? 닳는 건 아쉽지만 그만큼 나와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소중하다고 숨겨두면 눈에서 멀어지고, 결국 마음에서도 멀어지겠지. 이제는 애정하는 만큼 함께 다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