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에니어그램 #5] 4번 유형 탐구하기
에니어그램 1번 유형, 7번 유형을 소개하였고, 이제 4번 유형 차례이다.
1, 7, 4번의 에너지는 서로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묶어서 설명한다.
1번을 중심으로 본다면, 7번은 1번의 무거움과 경직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4번은 1번의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는 비밀 통로가 된다. 그래서 7번은 1번의 '활력 방향'이며, 4번은 1번의 '스트레스 방향'이라고 한다.
4번 유형을 위한 영화로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의 2011년 영화 <멜랑콜리아(Melancholia)>를 선정했다. 이 감독의 영화 중에서는 가장 순한 맛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4번 유형과 1번 유형의 완벽주의
2. '감정의, 감정에 의한, 감정을 위한' 영화
3. Part One. Justin - 행성이 된 여자
3-1> 오필리아의 이야기와 물의 이미지
3-2> 우울증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가?
3-3> 4번 우울증의 특징 - 염세주의와 예술적 승화
3-4> 행성이 되어버린 여자
4. Part Two. Claire -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클레어와 저스틴
4-1> 6번 유형의 불안과 믿음
나는 에니어그램을 연구하면서 1번이 다른 유형들의 원형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팀의 주장처럼 1번은 다른 에니어그램 유형들의 기준 역할을 한다. 괜히 1번을 배정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본능)과 신(신성) 사이에서 끼인 존재이다. 본능 레벨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동시에 더 높은 곳을 향하려는 것이 인간의 숨은 본성이다. 하찮은 삶처럼 보이더라도 모든 인간은 향상을 희구한다.
1번의 완벽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상향 본능이 고착된 것처럼 보인다.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은 완벽주의 1번 유형과 샴쌍둥이다.
'개인주의자, 예술가'로 불리는 4번은 '완벽주의자, 원칙주의자'인 1번과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 구조는 비슷하다. 4번은 장형 1번이 가슴형으로 전환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1번과 4번은 모두 고집이 대단하여, 한번 대치하면 서로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모든 유형들도 고집이 있지만, 이들의 싸움은 자기 기준에 대한 확고함에 근거한 일종의 '비타협적인 원칙 대결'이다.
1번과 4번은 모두 원칙주의자이다. 1번은 자신이 선택한 '그 원칙, 그 방법'을 내재화하는 반면, 4번은 '나'를 중심으로 내면의 감정을 기준으로 삼는다.
1번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이므로 객관적, 원칙적이다. 그러나 4번의 기준은 늘 출렁이며 변하는 감정이기 때문에 불규칙적이고 진폭이 크다.
1번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에너지는 4번 방향으로 이동한다. 자신의 객관적 원칙이 좌절되었을 때, 손쉽게 주관적 감정의 기준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1번은 은밀하게 4번 스타일의 방종을 즐긴다.
4번은 늘 변하는 감정에 기초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아 발견'이란 일생동안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야 할 기준 자체가 출렁이는 물과 같으니 4번의 정체성 구성 방식은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다. 특히 1번에게는 4번이 '알 수 없는 사람', '이해 불가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두 유형은 모두 완벽주의자이다. 1번은 '그 원칙'을 완벽하게 구현하려 하고, 4번은 '자신의 감정'에 완벽하게 충실하려고 한다.
<멜랑콜리아>는 프롤로그만으로도 유명하다. 회화를 하나하나 이어 붙인 듯한 프롤로그는 8분 동안 느리고도 아름답게 이어진다. 프롤로그는 영화 전체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영화를 다 본 뒤에 다시 돌아와서 본다면 장면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처음부터 결말까지 스케치하며 자신을 스포일러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는 이미 다 알려 주었으니,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주인공들의 내면 심리에 몰입해서 감상하라는 감독의 의도라고 볼 수 있겠다.
첫 장면에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우울하고 비장한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온다. 그리고 새들이 하늘에서 줄줄이 떨어져 내린다. 이 얼굴이 바로 관객이 몰입해야 할 주제이다.
초현실적인 영상과 함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Overture)이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영화에서 다른 음악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이 서곡만이 영화의 주요 장면마다 반복하여 흐른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영화 음악은 관객에게 적절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유도하고, 때로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멜랑콜리아>는 음악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한 곡만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며, 대신에 관객이 인물들의 말소리, 숨소리와 내면의 감정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는 '랜슬롯과 기네비어'의 이야기와 함께 유럽의 가장 유명한 비극적인 전설이다. 감독은 관객이 오직 사랑과 고통, 죽음을 모티프로 한 이 서곡이 자아내는 비장미 넘치는 감정의 외길을 따라갈 것을 원하는 것 같다. 마치, '이것이 우울의 모든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감독은 '감정의, 감정에 의한, 감정을 위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장치로써 배경과 서사, 음악을 최소화한다.
장소도 외딴 대저택 안으로 한정하고, 주변 인물들의 서사에도 관심이 없다.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1부는 저스틴, 2부는 클레어라는 인물에 집중한다.
영화는 행성 충돌로 인한 지구의 멸망이나 재난 영화가 아닌, 단지 행성 충돌 상황으로 내면을 은유할 뿐이다. 따라서 감독은 객관적 사실이나 과학적 근거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면세계는 은유적이고 신화적인 주관 세계이기 때문이다.
사실, 행성 충돌 직전까지 사람들이 멀쩡하게 숨 쉬고 말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행성 간의 대기와 중력이 서로 교란을 일으켜 한참 전에 지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텐데.
커스틴 던스트와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얼굴
영화는 오직 얼굴로 시작해서 얼굴로 끝난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출렁이는 작은 파도를 드러내는 표정 연기가 있었기에 <멜랑콜리아>는 완성된다.
저스틴 역의 커스틴 던스트는 참으로 독보적인 얼굴을 가진 배우이다. 뭔가 나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 귀찮은 듯한 도발적인 표정의 대가이다. 첫 화면을 가득 채운 커스틴의 얼굴은 멜랑콜리아 행성과 함께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초창기의 <브링 잇 온>에서만 해도 밝고 건강한 치어리더가 어울렸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독특한 분위기와 연기력을 키워나가는 배우 같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는 <이터널 선샤인>의 메리 역과 <파워 오브 독>의 로즈이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연이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극의 핵심을 이끄는 중요한 대사들이 이 배우를 통해서 나온다. <파워 오브 도그>에서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불꽃 연기 대결을 하며 신경쇠약으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두 작품과 <멜랑콜리아>의 캐릭터는 미묘하게 겹쳐 보인다.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도 좀 비슷한 느낌으로 떠오른다.
커스틴 던스트는 <멜랑콜리아>로 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파워 오브 독>의 연기도 많은 호평을 받았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언니 역의 샤를로트 갱스부르도 훌륭한 연기였다. 둘 중 누가 여우주연상을 타도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두 개의 파트로 구성된다. 1부의 제목은 '저스틴'이고, 2부는 '클레어'이다. 1부는 저스틴을 중심으로 저스틴과 마이클(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결혼식을, 2부는 클레어를 중심으로 행성 충돌을 앞둔 클레어 가족을 다룬다.
1, 2부는 각각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두 사람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춰준다. 1부에서는 클레어가 저스틴을 비춰주고, 2부는 저스틴이 클레어를 비춰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겨진 그림자를 드러내준다.
1부는 저스틴의 결혼식이 치러지는 하룻밤의 정경을 보여준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나면, 첫 장면에서 엄청 긴 하얀색 리무진이 좁은 시골길을 앞뒤로 후진해 가며 어렵게 나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저스틴은 행복한 듯 웃고 신랑과 키스도 하지만 얼굴은 어색하고 경직되어 있다. 앞으로의 결혼식도 뭔가 삐걱대며 잘 들어맞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저스틴의 우울증과 돌발 행동에 부모의 이상한 행동들까지 더해지면서 결혼식은 조금씩 계속해서 파국으로 치달아 간다.
3-1> 오필리아의 이야기와 물의 이미지
영화의 포스터에서 저스틴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부케를 들고 있다. 언뜻 보면 서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팔의 절반이 물속에 들어가 있고 바닥에 펼쳐진 듯한 베일의 형태를 보면 확실히 물에 누워 있다. 이 모습은 꽃을 들고 물에 누워있는 모습은 오필리아를 연상시킨다.
영화에는 많은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이다.
<햄릿(Hamlet)>의 여주인공인 오필리아는 19세기 영국 화가들에게 선호되는 주제였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연인인 햄릿에게 살해된다. 그림 속 장면은 오필리아가 미쳐서 물에 빠진 뒤 드레스가 다 젖을 동안 노래를 부르다 죽는 모습을 담고 있다.
햄릿의 배경인 16~17세기의 영국 사회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보수적인 사회였다. 연인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서서히 자기를 파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스틴의 우울증의 상황도 오필리아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는 것은 17세기의 오필리아나 21세기의 저스틴이나 다를 바 없다.
물(水)은 음양오행적 관점에서 보면 우울, 불안, 두려움을 상징한다. 계절적으로는 겨울을 의미하며, 모든 것이 말라붙고 얼어서 생명력이 지하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시기이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들이 호수나 깊은 물 근처에서 사는 것은 증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물에 빠져 있는 오필리아와 저스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충분히 우울을 표현해 낸다.
존 에버렛의 <오필리아> 그림의 모델인 엘리자베스 시달은 무려 4개월이나 물이 받아진 욕조에 누워 포즈를 취해야 했다고 한다.
영화에는 저스틴이 욕조에 누워있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하객들이 모두 신랑신부가 웨딩 케이크를 자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저스틴은 손님들을 놔두고 방으로 돌아가버린다. 탈진한 나머지 웨딩드레스를 벗고 욕조에 들어가서 멍한 눈으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하고 있다.
또 한 번은 결혼식이 파투 난 후 우울증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이다. 저스틴은 발 하나 드는 것도 힘겨워서 클레어의 도움으로 간신히 욕조에 몸을 눕힌다.
우울이란 그런 것이다. 의지나 기분전환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력과 같이 몸과 마음을 끌어내려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게 만든다.
3-2> 우울증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가?
심리상담에서 하는 주요한 작업은 어린 시절에 대한 탐색이다. 현재의 나를 만든 것에 대한 부모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저스틴의 부모도 그녀의 우울한 캐릭터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저스틴의 아버지는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실없는 농담을 하는 인물이다. 게다가 딸 결혼식에 사귀는 여자를 둘이나 데려온다. 둘 다 이름이 베티인 것은 코미디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꼴도 보기 싫어한다. 딸의 결혼 축하 연설에서도 공개적으로 서로를 디스 할 정도로 둘의 사이는 심각한 상황이다.
냉소적인 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은 결혼이 싫다며,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는 저주 섞인 말을 해댄다. 잘 참고 있던 저스틴의 형부까지 폭발시킬 정도로 어머니의 캐릭터도 대단하다.
아버지는 딸에게 자상하기는 하지만, 딸의 정서적 필요를 살피기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이다. 저스틴이 아빠에게 하룻밤 묶고 갈 것을 간청하지만, 결국 썸 타던 여자의 차를 타고 휭~ 가버린다.
이 정도 콩가루 집안이면 저스틴의 우울과 냉소가 잘 설명된다. 클레어의 정서도 온전할 리 없지만, 단지 큰 딸로서 책임감이 강하여 내색을 못할 뿐이다. 2부에서 클레어의 내면의 불안이 잘 나타난다.
모든 것을 부모탓으로 돌리면 참 편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후천적 환경이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 같지만, 에니어그램 유형은 타고나는 것이다. 부모의 영향이 타고난 유형을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유형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단지 정서가 건강한지 불건강한지, 안정적인지 불안정적인지를 좌우할 뿐이다. 이는 대부분 유형론(성격론)의 기본 전제이다.
영화에서 유추해 보건대, 저스틴은 감정형의 4번 유형으로, 클레어는 머리형의 6번 유형으로 가정하고 글을 진행하려고 한다. 부모의 영향에 의해 저스틴은 4번의 우울증과 염세주의가 심해졌고, 클레어는 6번의 불안과 두려움이 심해졌다.
유형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왜 다르게 타고나는 것일까? 나는 까르마(karma), 즉 업(業)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논리적이니까.
3-3> 4번 우울증의 특징 - 염세주의와 예술적 승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신경증과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친숙한 우울의 내면세계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표현한다.
저스틴의 우울증은 행성 폭발로 은유되며, 서서히 멸망으로 치닫는 지구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이 무너지는 과정과도 같다.
영화는 지구가 폭발하며 끝나지만, 저스틴의 마음속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구가 멸망하는 듯한 감정적 사건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마치 끝없는 윤회를 겪는 것처럼, 저스틴의 내면은 외부의 변화와 상관없이 반복된다.
많은 스토리에서 사랑의 힘으로 우울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낫는 것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우울증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아무리 사랑과 헌신을 베풀어주어도 사라지기 힘들다.
주위 사람들이 조금씩 나가떨어져 갈 뿐이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어떻게 해서든 신부의 마음을 사려고 애쓰던 마이클(예비 신랑)도 결국 포기하고 저스틴을 떠나간다.
마이클은 비밀리에 과수원을 구입하고 깜짝 선물로 의기양양하게 저스틴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진을 꼭 지니고 다니라고 부탁했건만... 저스틴의 마음에 전혀 가 닿지 못하고 그대로 소파에 흘러내린다. 그것을 본 마이클의 황망한 표정.
저스틴은 사실 자신을 가누기조차 힘들어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할 여유조차 없다. 물에 푹 젖은 스펀지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도 무거운 중력 속에서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의 속도도 질질 끄는 느낌이다. 의도적인 슬로모션은 관객들에게 저스틴과 함께 깊은 수렁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우울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과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4번 유형의 우울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감정형인 4번 유형은 감정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느낀다. 따라서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은 특정한 감정을 붙들고 고양시키는 것은 4번에게 있어서 일종의 예술 행위와도 같다.
4번 유형의 특수한 방어기제는 예술적인 승화이다. 이들은 감정을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상징과 의식, 극적인 멋부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4번에게 있어서 진정한 슬픔과 거절의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한 방어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스스로는 "나처럼 똑바로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면, 누구든지 자신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4번 유형은 이러한 방어기제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자기가 꾸민 세계 안에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 이들은 누군가 충고하거나 도와주려 하면 오히려 적대시하고, 진주조개처럼 자신의 '달콤한 아픔'을 품고 있으려 한다.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은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마치 맑게 개인 날에는 문 밖으로 나갔다가, 흐린 날에는 집 안에 칩거하는 것처럼 사랑이 샘솟다가도 갑작스럽게 열정이 식어버린다. 이런 상태에서 이들은 타인을 오로지 어떤 갈망, 기억 또는 꿈을 위한 감정적 출구로만 사용할 위험이 있다.
저스틴은 처음에는 마이클을 사랑했으므로 결혼까지 왔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세계의 정체성이 훨씬 중요하였기에, 감정이 출렁일 때마다 상대방을 밀어낸다.
1부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저스틴의 안하무인의 민폐 행동에 속이 답답했을 것이다. 실제로 불건강한 4번 유형들은 남들의 감정에는 놀랄 만큼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3-4> 행성이 되어버린 여자
1부와 2부의 상황은 겉으로는 극과 극으로 대비된다. 1부는 정상적인 삶의 정점이며 마땅히 행복해야 할 결혼식이 치러지고, 2부는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멸망의 상황이다.
그러나 저스틴의 내면은 반대로 진행된다. 결혼식에서는 매우 무력하고 고통스러웠으나, 행성 충돌을 앞두고는 우울증이 다 나은 듯 침착해진다. 외부의 어떤 사건에도 무감동했는데, 지구 멸망 정도 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자 저스틴은 잠에서 깨어난 듯 각성된다.
클레어는 저스틴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미트로프를 만들어서 동생을 북돋워주려 하지만, 저스틴은 '잿더미 같은 맛'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스틴은 멸망이 가까워 올수록 감각이 살아나고, 동물적 본능이 일깨워진다.
마구간에서 말들의 울음소리가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과학적인 근거와 관계없이 직감적으로 멸망을 감지한다.
저스틴에게 행성 충돌은 통증조차 못 느끼는 무딘 감각을 깨워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웨이크 업 콜(wake up call)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방어적 염세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방어적 염세주의는 끔찍한 가능성을 숙고하는 일이 역설적으로 불안을 덜어주는 현상이다. 실제로 늘 최악을 상상하는 우울증 환자들은 끔찍한 현상을 맞닥뜨렸을 때 의외로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저스틴의 모습에는 단지 방어적 염세주의를 넘어서 초월적인 힘이 느껴진다.
인도의 SF 소설가인 반다나 싱의 단편집 <Trampoline> 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라는 작품이 있다. 람나스 미슈라는 어느 날 자신을 행성이라 선언한다. 그리고 행성은 태양이 필요하다며 몸을 감싼 사리를 벗어던진다.
"마침내 내가 무엇인지 이제 알았어. 난 행성이야. 여자, 아내, 어머니 이런 것 말고..."
그녀는 점차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낯선 모습으로 변해간다. 인간의 병을 위한 약도 모두 필요 없게 되었다. 저스틴도 개별 정체성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우울과 불안을 품은 '멜랑콜리아' 행성 자체가 되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어둡고 기괴한 영화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김기덕 감독과도 많이 비교된다. 이들은 불편하고 절망적인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치유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파괴적이고 절망적인 세계관을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병적인 불안과 공포가 덜어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트리에 감독의 영화 <살인마 잭의 집>에서 잭은 강박증(Obsessive-Compulsive Disorder) 환자였는데 살인을 하면서 오히려 강박증이 조금씩 누그러진다.
방어적 염세주의는 가슴형뿐 아니라 머리형에게도 많이 드러나는 특징이다. 특히 에니어그램 5번, 6번 유형들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는 대상을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심지어 그것과 관련된 것을 직업으로 삼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4번 유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멜랑콜리아>를 보면서 감독은 저스틴보다는 6번인 클레어에 더 가까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4-1> 6번 유형의 불안과 믿음
2부는 결혼식이 파투 난 이후의 클레어 가족과 저스틴이 살고 있는 대저택에서 진행된다.
결혼식 이후 저스틴의 상태는 더 악화되어 혼자 걷지도, 씻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욕조에 들어가기 위해 한 발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서 주저앉고 만다. 클레어는 동생을 걱정하며 세심하게 돌봐준다.
성실하고 침착한 언니가 민폐덩어리 동생을 떠맡은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스틴과 클레어의 상태는 점점 반전된다.
영화에서 가장 성실하며 우울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뽑아 순위를 매겨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존(형부) – 클레어(언니) – 니오(조카) – 저스틴(동생)
그러나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행성 앞에서 취하는 반응들이 얼마나 의연한가'에 대한 순위를 매겨 보면, 정반대가 된다. 이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근거가 깨짐에 따라 차례로 무너진다.
존은 시종일관 행성이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믿음이 깨지자 그 누구보다도 가장 빨리 무너져 버린다.
존은 클레어에게 두려워할 필요 없으며, 우리 인생에 가장 멋진 경험이 될 거라며 낙관한다. 존의 낙관의 근거는 멜랑콜리아가 수성과 화성을 비껴갔듯이 지구의 코 앞을 비껴서 지나갈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말이다. 과학자들이 틀렸음을 망원경으로 확인하고 나서, 존은 가장 먼저 약을 먹고 자살한다.
클레어는 6번 유형의 특징인 의심과 불안을 떨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존을 가장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아들 리오가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다. 믿었던 존이 자살하자 클레어를 지탱하던 토대가 급격히 무너진다. 리오는 엄마의 불안을 그대로 전달받아 불안을 느낀다.
반면 저스틴은 자신의 존재 기반이 이미 염세적인 깊은 수렁에 있었기에 외부 상황을 쉽게, 심지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충돌 전날, 저스틴과 클레어는 서로의 믿음의 근거에 대해 대화한다.
클레어 : "오늘 밤 지나가겠지? 존은 그걸 아주 확신해."
저스틴 : "그래서 진정이 돼?"
클레어 : "그래, 물론. 존은 다 연구해. 늘 그랬지."
저스틴 :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할 필요 없어. 아무도 못 피해."
클레어 : "하지만 리오는 어디서 자라지?"
저스틴 : "내가 아는 건… 지구상의 생명은 사악하다는 거야. 없어져도 아쉬울 것 없어."
클레어가 저스틴에게 두 번이나 똑같이 한 말이 있다.
"나는 가끔 네가 정말 싫어, 저스틴.(Sometimes I hate you so much, Justin.)"
한 번은 1부에서 결혼식이 완전 파국으로 치닫고 나서, 한 번은 2부에서 행성 충돌이 확실시되었을 때 다음의 대화를 하면서 마지막에 말한다.
클레어 : "우리가 함께 했으면 해. 그게 일어나면. 그러니까.. 밖의 테라스에서. 날 도와줘, 저스틴. 난 이걸 제대로 하고 싶어."
저스틴 : "빨리 하는 게 좋겠어."
클레어 : "함께 와인 한 잔.. 어쩌면.."
저스틴 : "와인 한 잔 하자고 테라스에서?"
클레어 : "그래. 할래?"
저스틴 : "노래는 어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그런 거? 어쩌면 촛불을 켤까? 언니는 우리가 테라스에 모이길 바라. 노래를 부르고, 와인을 마시고."
클레어 : "그래. 그러면 내가 편안하겠어."
저스틴 : "내가 언니 계획을 어떻게 보는지 알아? 난 엿 같다고 봐."
클레어 : "저스틴, 제발.. 난 그냥 좋게 가고 싶어."
저스틴 : "좋게? 왜 망할 화장실에서 모이지?"
클레어 : "나는 가끔 네가 정말 싫어, 저스틴.(Sometimes I hate you so much, Justin.)"
똑같은 말을 통해 클레어는 1부에서는 저스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난했지만, 2부에서는 저스틴을 올려다보며 간청한다.
그러나 두 자매는 서로의 행성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저스틴은 멜랑콜리아 행성에, 클레어는 지구 행성에 있다.
마지막 죽음을 대하는 자세조차 서로 다르다.
세 사람은 최후의 순간, 저스틴이 만든 신비스러운 '마법 동굴' 안에 앉아 손을 마주 잡는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클레어는 어쩔 수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온다.
저스틴과 리오는 마법 동굴을 믿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클레어는 저스틴의 마법을 전혀 신뢰하지 못할 뿐이다. 클레어는 마지막 섬광이 번쩍하는 순간에 몸을 떨며 웅크린다.
클레어는 자신의 바람대로 테라스에서 와인 한 잔 했다면 제대로 견뎌냈을까?
# 4번 유형에 대한 또 다른 글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세요.
#멜랑콜리아 #라스폰트리에 #커스틴던스트 #샤를로트갱스부르 #우울증 #에니어그램4번 #에니어그램6번 #오필리아 #반다나싱 #자신을행성이라생각한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