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벼랑 끝 날 선 모서리를 따라 흩어지는 시간을 홀로 견디고 있다. 전단의 문구가 성경의 한 구절임을 알게 된 후 살면서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성경도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보기도 하고 명상에 관련된 영상들도 찾아 따라 해 보기도 한다. 언젠가 무작정 근린공원 트랙을 달린 후 땀에 젖은 몸이 마음의 무게를 한결 가볍게 하는 경험 이후부터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트랙을 이를 악물고 달린다. 그렇다고 마음에 어려움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난 지금도 헐떡이며 근린공원 트랙을 달리고 있다.
오전에 구직 사이트에서 본 회사에 이력서를 직접 가져 가 넣어보려 전철에 올랐었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전철에서 내리려는데 뒤에서 한 아줌마가 나의 옆구리를 가격하듯 밀쳐내며 먼저 내려버린 것이다. 러시아워 때도 아니라서 플랫폼은 한산했고 전철 안 또한 한산했음에도…
아줌마가 엘보우로 가격한 옆구리의 통증을 떠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태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해 있었고 찾아간 회사의 직원들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아줌마의 뒤뚱거리며 뛰어내리는 뒷모습이 떠올라 분노가 점점 차올랐었다. 괜스레 앞에 앉은 아주머니의 껌 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죽여버리고 싶다는 망상으로 머릿속이 가득해졌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눈을 감자 허공을 떠도는 망상들이 내 영혼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난 그냥 그 망상들이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감고 조용히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을 했다. 전철이 선로 위를 달리며 내는 마찰음,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의 소리들, 그리고 내 안에서 울리는 심장 박동…,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냄비에 물을 올리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삐-하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왼쪽 귀를 통해 뇌 속에서 울려왔다. 난 가스불을 끄고 낡은 운동화의 끈을 조여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몇 번의 면접 기회가 있었다. 그 후에 어디에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자신감 없어 보이는 꾸부정한 자세, 불규칙한 생활과 절망을 술로 달랜 창백한 얼굴에 생긴 짙은 다크서클로 인해 어디 아프냐는 질문부터 받기 일쑤였다. 그래서, 우선 나 자신을 먼저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정신건강증진센터에 정기적으로 빠지지 않고 방문하고 있다. 개인정보와 상담내용은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된다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상담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나름 세워놓은 계획안에 일상이 반복적으로 돌아가도록 습관을 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가능한 늦어도 11시에는 잠을 청하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 잠들면 다시는 눈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유일한 친구인 술도 끊고 규칙적으로 꾸준하게 하루 2시간씩 맨몸 운동과 달리기를 했다. 달리는 내내 몸뚱이에서 전해지는 고통과 기억의 아픔들로 눈물을 흘리며 달려야 했던 날들도 많았다.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나자 불룩했던 커다란 원 팩의 뱃살도 많이 사라지고 얼굴에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씻고 난 후 김서림을 닦아낸다. 거울 속 변한 내 모습에 빙그레 웃어 본다. 아직은 건강한 청년의 밝은 미소처럼 보여 왠지 자신감이 넘친다. 비록, 다른 이들 눈에는 실패한 백수로 보이는 시간이겠지만 그 안에서 난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해 가고 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지 막연했던 것들이 구체화되는 시간을 살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주변의 무시와 차가운 냉대에 그 알량한 자존심이 다칠 때면 아직도 살인과 자살의 복합적 충동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트랙을 달리고 또 달리며 나 자신을 다독인다.
오늘도 내달린 근린공원 트랙 위 차가운 새벽 공기가 이마에 흐른 땀을 식혀준다. 올려다본 겨울 하늘 안에 자그마한 별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젊은이"
누군가 뒤에서 나의 어깨를 건드린다. 뒤돌아선 내 앞에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따듯한 미소로 서 있다.
"저요? 왜 그러시죠?"
"아니.. 별거 아니고 이거 받아."
할아버지가 스포츠 음료 캔 하나를 내게 불쑥 내민다.
"여기 매일 나와서 열심히도 달리던데, 이거 마시고 파이팅!" 부드러운 미소의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동시에 주먹을 쥐어 올려 보이신다. 그리고서 할아버지는 시크하게 할머니의 부축을 받으시며 지팡이에 의지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걸어가신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뒤돌아 보시며 손을 흔드신다.
받아 든 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마음 한구석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피어 올라 이내 두 눈을 통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