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어제의 일을 되씹어 보지만 기억할 수 없다. 두려움에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한다. 이 나이에 벌써 알츠하이머라도 온 건가 덜컥 겁부터 난다. 오늘은 이 작디작은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야겠다. 혼란한 내 머릿속을 청소하듯이.
오랜만에 끈적거리지 않는 거실 바닥에 앉아 현관문을 응시한다. 저 너머에 세상이 있다. 난 저 너머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찾지 않는다. 아니, 나란 존재 자체를 모른다. 존재를 부정당한 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호흡이 멈추며 눈앞이 깜깜해진다. 펄떡이는 심장이 마치 내 목구멍을 뚫고 나올 것 같다. 진정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불현듯 어둠 너머 작은 빛이 서서히 다가온다.
또 정신을 잃었나 보다. 두통이 심하다. 약을 먹어야겠다. 일어서려 하지만 너무 심한 두통 탓에 일어설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겁이 난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워 서랍을 열어보지만, 진통제는커녕 뭔 놈의 요금 통지서들만 가득하다. 약을 사러 나가야겠다.
뭐가 그리들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하교하는 아이들이 가파른 언덕길을 힘겹게 내려가는 내 옆을 스치며 달려 올라간다. 나도 저만할 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저렇게 즐거웠을까 생각한다. 약국에서 진통제 하나 사 들고 다시 가파른 언덕길을 터벅터벅 걸어 오른다. 두통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낡은 동네 어귀에 있는 놀이터 벤치에 너덜한 몸을 앉힌다. 예전 같으면 이럴 땐 담배 한 개비 태우기도 하겠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다. 과태료도 그렇지만 담뱃값이 엄청나게 오른 그해 나도 금연을 반강제적으로 당했기 때문이다. 낡은 카디건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다.
게임기로 전락한 노트북을 열어 오랜만에 취업 사이트들을 뒤적인다. 내가 지원할 마땅한 곳은 한 군데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력서를 닥치는 대로 접수한다. 얼마나 많은 곳에 접수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어두운 녹색의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다. 조그마한 안도의 희망을 안고 "그래 포기하지 말자." 혼자 중얼거려 본다. 내일은 누군가가 나를 찾을 거라는 그런 소망을 가져본다. 내일의 희망에 심장이 부드럽게 두근거린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출처 불명의 안도감에 미소가 지어진다.
며칠째 스마트폰을 손에 꼭 쥐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 나를 찾지 않을까 하는 갈망이 어두워져 가는 창밖 풍경과 함께 조바심으로 바뀌어 가고 이젠 슬슬 화가 치민다. 오늘도 나를 찾은 이는 아무도 없다. 찢겨 나간 신문지의 한 귀퉁이가 되어 길가에서 나뒹구는 심정이다. 흘깃 쳐다본 현관문에 화가 폭발한다. 냅다 달려가 발로 걷어 차 보지만 내 발가락만 아플 뿐이다. 부어오른 가운뎃 발가락을 어루만지는데 욱신거리는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그 염병하게 아픈 발가락 위로 떨어진다. 밀려오는 절망감에 눈앞이 깜깜해지고 호흡이 멈춘다. 심장이 발작이라도 하듯 터질 듯이 뛴다. 이내 몸이 덜덜 떨리며 거실 바닥에 쓰러진다.
'호흡해야 한다. 호흡을 해야만 한다.'
그때 눈앞에 자그마한 불빛이 보인다. 그 불빛이 점점 내게로 다가온다. 호흡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터질 듯 뛰는 내 심장 소리만이 온몸을 울리며 들려온다.
난 지금 어딘지 모르는 하지만 어딘지 알 것 같은 길 위에 서 있다. 누구인지 모르는 한편으로는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사람들이 물결치듯 춤추며 내 곁을 흘러간다. 난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음을 인지한다. 소리를 들어 보려 귀 기울여 본다. 그러나,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심지어 내 목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무음의 공간에 흐르듯이 나를 스치는 알지 못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들 속에 그냥 서 있다. 그들은 나의 존재를 모르는 듯 무심하게 지나쳐간다. 두려운 마음이 들어 한걸음 옮겨 보는 순간 어둠에 사로잡힌다.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 심한 두통과 함께 누렇게 변색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찌릿한 발가락의 통증과 구역질 날듯 아픈 두통, 황급히 진통제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사그라들 줄 모르는 통증들, 방금 그건 뭐였을까... 두렵고 이상한 느낌과 함께 편안함을 느끼는 건 왜일까? 이러다 정말 미쳐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정신과 진료라도 받아봐야 하나 싶지만, 괜스레 취업에 걸림돌이 될까 망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