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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리나 Jan 26. 2021

능력주의의 폐해를 넘어서기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책은 능력주의의 민낯을 파헤치고 있다. 오늘날 능력주의의 폐해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저자가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자신이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왜 가난할까라는 질문에 미국인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탓이라고 대답 했다. 과반수의 미국인들은 인생의 성공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에 반대를 했다. 


   "가난한 사람이 자력으로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 미국인은 70%의 사람들이 그렇다라고 답한 반면, 유럽인은 35%만이 가능하다고 답을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답을 할까? 유럽사람보다 더 낮게 나오지 않을까? 이 질문을 보다 보니 <힐빌리의 노래> 가 생각이 난다. 가난한 노동자 계층 출신인 힐빌리가 가난을 벗어나 성공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흔히 미국사회의 감추어진 민낯을 보게 했다는 말을 들은 이 책은 가난이 왜 대물림되고 무기력이 학습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가난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만도, 가족의 도움으로만도, 교육의 혜택으로만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게 더 결합이 되어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부쩍 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시스템이 갖추어져야만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정의와 능력주의는 점점 공존하기 어려워진다. 능력주의가 만연해지면서 승자들 사이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차별과 편견이 가해지고 있다. 미국에서 심각해져가고 있는 것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갈등이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계층의 엘리트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은 자신들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미국사회에서 SAT의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연관도가 높다. 소득 수준이 올라갈 수록 평균점수가 올라간다. 부유하고 고학력인 부모를 가진 자녀의 점수가 높을 수밖에 없게 된다. 고등학교 내신 성적도 어느 정도는 집안 소득 수준과 연관되어 있지만 SAT점수가 그 연관성에서 훨씬 크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수학능력평가의 점수는 부모가 고학력일수록 경제력이 풍족할 수록 올라간다. 전혀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수능이 공정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관관계를 무시한다.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오만을 가지게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패배주의를 안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에는 운이 작용했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겸손한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가 두드러진 곳은 명문대 입시에서이다. 소득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더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명문대 졸업자는 고소득 직업을 갖는 것은 유리하지만 사회적 상승을 이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명문대 생들이 이미 상류층이기 때문이다. 명문대들은 능력 위계 질서의 정점에 있다. 하지만 이런 명문대 입시 준비는 10대 청소년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고 스트레스를 심화시켜 정신 건강에 이상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부모들의 지나친 개입때문에 극심한 고립감과 무력감을 겪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도 비슷할 것 같은데 <스카이 캐슬> 드라마를 보면 잘 나와 있다. ) 2000년 이후 20대의 자살률이 실제로 많이 올라가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명문대 입시에서 제비뽑기를 제안한다. 아무리 유능한 입학사정관이라도 할지라도 입학 할 수 있는 학생을 선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하다니 흥미롭다. 제비뽑기로 입시를 치루게 되면 능력주의의 결과인 오만을 뺄 수 있고, 자신의 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종 목표는 4년제 대학학위가 없어도 인생의 길을 찾을 수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이 의견에 너무 공감하고 동의하는데,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하자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모임 분 중에 대학 입시를 가위바위보로 정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때는 그냥 웃으며 흘려들었는데, 이 챕터를 읽다보니 그 분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운’이 주는 능력 이상의 성공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인드로 연대하며, 일 자체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당장의 해결책을 내놓는 건 아니다. 지금 이제 우리는 능력주의의 폐단을 직시해야만 하는 시기임을 자각해야 할 시점이다.  엘리트 중심의 사회에서 학력주의와 능력주의는 사회적 상승 중심의 담론만 이루어져 왔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벗어나서 공동선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다 같이 논의를 해보아야 한다.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일의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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