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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리나 Sep 02. 202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국민법정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알려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이 시작되어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터를 주도한 핵심 인물로 어린이 150만명을 포함해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장본인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예루살렘 정보국 모사드에서는 전범들의 위치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에서 신분을 위장하여 살고 있는 아이히만을 잡아 와 예루살렘 법정에 세웁니다. 재판장에 선 아이히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키작은 50대 중반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모든 혐의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재판을 모두 참관한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를 기록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냈습니다. 이 글은 유대인 공동체에 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아렌트의 보고서에 의하면 좀더 효율적으로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시키는데 몰두했던 아이히만에게서 악마의 징후는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건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을 지닌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재판 내내 자신은 명령을 지켰고, 법을 지켰으며 자신은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지시를 따르고 명령을 지켰지만 이를 전체적으로 사고할 만한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를 아렌트는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라고 정의내립니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악이라고 설명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란 말이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인간에게 악이란 건 따로 있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내용을 따와 SF형식으로 소설을 쓴 장강명의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계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쓴 소설입니다. 만약 그 대상이 악인이라면 어떨까요. 과학이 이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른바 체험 공유장치 기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통치하는 알래스카에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은 당시에 자신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과 같이 행동했을 거라는 주장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에밀 벤야민과 아이히만은 기계에 들어가 각자의 체험과 기억을 공유하게 됩니다.   


 아이히만은 기계에 들어가 나온 뒤 회개를 하고 용서를 구하지만 실은 아이히만이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을 다시 만나러 간 벤자민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책에 넣어가져간 날카로운 칼로 아이히만의 목을 긋고 자신도 자살을 합니다. 벤야민이 마지막 남긴 메모에는 이렇게 남겨져 있습니다.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아있는게 더 낫다'라고요.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상대방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타자화와 배제'는 인간적 사유의 본질일까요?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해하게 된다면 더 큰 심리적 고통을 감당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해자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게 불가능해진다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무엇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까요. 가해자를 향한 적의와 분노는 갈길을 잃고 헤매게 되고 삶의 구심점도 무너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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