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그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0. 마지막 장면
"사랑해요, 사랑했었고 지금도 그래요."
하늘이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말하는 동안, 성록은 당황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그 순간 성록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기쁨과 동시에 걱정이었다. 성록은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으며 잠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언젠가 돌아가야 할 가장 마지막 지점은 당연히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렇게 배워 온 사람이었고 그 사실에 대해 어떤 의심을 해 본 적도 없다. 어떤 곤란한 상황도 원하지 않는다. 친구를 가장한, 그러나 내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 친한 거래처 사람으로 포장된 관계. 적당히 서로의 감정에 솔직하고 때가 되면 헤어지는 것은 두 사람의 암묵적인 규칙인데, 하늘은 그 룰을 말 한마디로 가볍게 어긴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긴 하늘의 태도가 아니라, 그런 하늘을 보는 성록의 마음에 이상한 물결이 인다는 것이다. 이상했다.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하늘의 본래 성격 때문은 아니었고, 언젠가 헤어지는 순간이 오면 안타까운 마음 정도야 들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예상과 달랐다. 정말 헤어지는 그 순간이 오면, 이상하게 슬플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성록은 무심하게 슬펐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하늘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그녀는, 그러니까 그녀를 생각하면 드는 감정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느끼는 연대감과 우정에 가까웠다.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으며, 유쾌하고 어린아이 같은 면도 있었다.
자신과 다른 상대에 대해 강렬하게 일어나는, 남자아이들이 흔히 가질 법 한 강렬한 호기심에 더해진 호감. 그 감정만으로도 그녀를 만나는 시간이 즐거웠기에 부담되지 않았다. 그녀가 가끔 끝없는 감정의 골로 빠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감정을 위로하고 싶지도, 위로할 이유도 없을 만큼 둘의 사이는 가까우나 친밀하진 않았다.
그런데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하늘은 규칙을 어기고 있다. 돌아가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복잡한 심정이 드는 성록의 마음이다. 누구보다 헌신적인 아내를 아낀다. 애정을 쏟아 키운 딸을 사랑한다. 그 마음과 별개로 여기 남을 하늘을 자신이 버려두고 간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연민과 안타까움에 더해서 벌써부터 느껴지는 그리움. 그리고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올 것이라는 명확해서 무서운 예감.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스스로 혼란스럽고,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솔직한 감정과 마주 한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 후회된다.
왜 나는 내 감정을 마주 본 적이 이토록 없는 것일까. 도대체 40년 인생을 어떻게 산 거지?
1. 용하늘
하늘이 어른이 되어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해결해야 하고, 스스로 판단해 보험을 가입하고 저축을 선택하여 돈을 모으며 자신을 오롯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일련의 일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또 지극히 당연하게 해야 하는 어른의 임무들 중 가장 자신을 귀찮고 곤란스럽게 만드는 것들. 그중 가장 힘들게 느껴진 것은 아침에 일어나 학교를 가듯 직장을 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가장 절망적인 것은, 일에는 방학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을 힘들게 느끼고 버거워하는 하늘을 보며 부모님과 일과 친척들은, 친구들은 “철이 없다”라고 말했다. 애 같아서, 철이 덜 들어 그런 것이라고. (아니 그럼 자기들은 힘들지 않다는 말인가??)
몇 년 전 한 번, 하늘이 직장을 그만두고 긴 여행 (이라고 해도 2~3 달이었다.)을 갈 때 그들의 질책은 하늘을 찔렀는데, 그건 아마 질투인 것 같았으나 쨌든 질책은 아픈 법이었다. 그런 하늘이 유일하게 자신의 모습을 내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성록 앞이었다. 잘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하룻밤 함께 지내는 일을 여러 번 하다가 헤어지게 될 사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하늘에게 가장 편한 사람은 성록이었다. 자신을 판단하는 일도, 그로 인해 바뀔 관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무엇보다 가깝지만 친밀하지 않은 사이 이기에.
‘지킬 것들이 있기에 무모한 행동으로 나를 곤란하게 하거나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라는 안전장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하늘의 판단 역시 둘의 관계가 시작된 이유 중 하나였다. 또래의 남자들을 만나면 늘 사소하거나 큰 문제가 생겼는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거나 먼저 이별을 고하면 추문을 만들어 하늘을 깎아내리거나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그것이 폭력인 줄 몰랐다. 혹은 결혼을 보채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늘의 잘못 인 듯 거센 힐난과 함께 관계를 일방적으로 닫아 버리곤 했다. 나이나 배움과 무관하게, 한결 같이 어리석은 행동들을 반복하는 사람들과의 그런 관계에 하늘은 질렸고, 성록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날, 이런 관계가 나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짜증스럽고 폭력적인 연애들에 지쳐있던 하늘과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본능에 충실했던 성록의 만남은 벌써 2년이 다 되었다.
2. 첫 만남
이야아 아!!!!!!!!!! 부장님!!!!!!!!!!! 멀리서 그녀가 웃으며 걸어온다.
어떻게 나이를 먹어도 저런 감탄사가, 저런 표정과 행동이 나올까? 저 여자는 회계가 아니라 영업이나 CS를 해야겠는데 부서를 잘 못 골랐네. 하는 생각과 함께 성록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거래처를 오가며 몇 번 본 사이였고 회사끼리 저녁을 하는 자리인데, 근처 지리를 잘 모르는 성록을 위해 큰길까지 업체 사장이 하늘을 마중 보낸 것이었다. 단정하지만 어딘가 허술한 옷차림(이라고 생각했으나 구두 신은 걸음걸이가 어색하다), 약간의 눈웃음. 통통한 입술과 보조개에서 나오는 묘한 분위기. 거기에 어마무시한 감탄사. 부조화한 부분이 분명 있는 것 같은 분위기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 호기심을 더하여 인사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깊어 갔고, 업무 이야기보다 그녀와 둘이서 사람들을 피해 구석에서, 세상 이야기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경험이 많아서인지 혹은 둘 다 인지, 자신만의 소신 같은 고집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융통성과 사람에 대한 냉철한 면과 더불어 따듯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보일 만한, 만날 수록 괜찮아 보이는 사람. 게다가 성록의 이야기를 차분히, 그리고 재미있게 잘 들어 줄줄 알았다. 친절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술잔을 기울이고 마지막 이성을 잃을 때쯤, 하늘과 성록은 같은 장소에서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까지 함께 있었다.
3. 관계의 지속
이후 성록이 S 시로 출장을 갈 때마다 둘은 만났고, 나중엔 하늘이 성록을 만나기 위해 C 시로 깜짝 방문하기도 했다. 여느 연인 같은 둘의 모습을 식당 종업원 같은 낯 모르는 사람들은 예쁘다 했다. 어느 금요일, 성록은 직장 근처 광화문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하늘을 기다리며 교보문고를 들어가 책을 집었는데, 처음 든 책에 이런 시가 있었다.
네 존재는 참 신기해
나는 참 간사해
하루 종일 미운 날이라 불렀거든
그런데 네가 왔다 간 후로는
밉지가 않은 거야
날씨가 너무너무 좋은 거야
_나선미
이 시는 성록의 마음 같았고 처음 집은 책에 이 시가 나온 것은 운명이었다.
세상의 많은 연애 소설들은 둘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시간조차 행복하여 세상이 핑그르르 돌만큼 행복에 겨웠던 그 날을 오래도록 생각했다.
생각지 못한 감정이었다.
밥을 오물거리며 먹는 그녀의 입이 이뻤다.
보통 키와 다르게 작은 손발은 가지런하고 뽀얗기만 했다.
많이 먹으면 올챙이처럼 나오는 배가 귀여웠다.
자기 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모든 모습에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함께 제주도를 여행했을 땐, 세상엔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4. 원래의 자리
갑작스럽게 도입된 평가 제도로 인해 해외 지사 실적 문제로 경질받은 성록은 본사가 있는 중국으로 예정 없이 급히 돌아간다. 체류를 연장할 방법이 없다. 이후엔 가족이 있는 네덜란드로 돌아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기자기하고 평안한 풍경과, 강물이 얼면 딸을 데리고 스케이트나 썰매를 가지고 산책을 나가기도 하는 겨울이 긴, 저 먼 나라로.
처음 예정된 8년의 체류 기간보다 4년이 앞당겨졌다. 예상치 못한 이별이지만 둘은 담담하게 공항에 서 있다. 마치 C 시로 성록을 보내는 것처럼, 곧 다시 만날 것처럼 하늘의 표정은 담담하다. 그러나 성록은 먼 곳으로 간다. 원래의 삶으로, 그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잘 가라는 인사 대신 하늘이 말한다. "사랑해요, 사랑했었고 지금도 그래요."
도대체 왜..? 왜 지금..? 성록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공항 게이트로 들어간다. 뒤 돌아보니 하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딱히 슬픈 얼굴도 아닌데, 정작 성록은 눈가가 촉촉해진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늘의 존재와 기억은 잠시 그를 앓게 하다, 시간과 함께 휘발될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