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여름 저녁

잠이 든다

by 지효네

오늘은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지, 미술을 다녀온 지효가 조잘조잘 말이 많다.


“선생님 차에 딱 앉아서 다녀왔어”

“오늘 선생님이랑 미술 했어. 공부도 했어”

“지효 최고네”(엄마가 본인한테 해 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이다. 자폐아는 반향어와 함께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곤 한다.)


간식을 먹고 방에 들어온 지효가 조물딱 블록을 가지고 놀더니 이내 눕는다.

“엄마도 같이 코 누울까”(엄마도 같이 누워요)

“그러자!”


대화라고 할 수 없는 일방적인 대거리를 나누기 시작한 지효의 이야기가 차츰 느려지고 작아진다.

눈이 감기고 내 몸에 기댄 팔에 힘이 없어지고 늘어진다.

초저녁 창밖에서 들어오는 어스름함 그리고 훅 들어오는 습기 가득한 바람과 풀 비린내와 흙내음 가득한 한여름날의 냄새…

거기에 윙윙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에 지효의 머릿속은 점점 보라색으로 물들며 잠이 들었을 것이다.

어린 날 내가 그랬듯이…


싸우시는 부모님 덕에 나는 외갓집에 자주 맡겨졌더랬다.

그런 여름날이면, 나는 노 할머니 방에서 잠이 들었다.

2층 양옥집이었던 외갓집에 노 할머니 방은 1층 문간방이라 마당에 들락거리기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판피린과 박카스가 박스채로 쟁여 있는 쿰쿰한 냄새가 나는 다락방이 있었다.

혼자 하릴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작은 아이에게 다락방은 큰 친구가 되어 주었다.

늦은 저녁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노 할머니가 단정히 마련해 주신 잠자리에 누워 할머니를 만진다.

할머니는 내 머리가 베개에 배길까 고무줄도 풀러 주고, 모기에 물릴까 툇마루에 모기향도 피워주었다.

더울까 한껏 열려있던 창문에 한가득 걸려있던 달빛 덕에 그 어둠 속에서도 할머니의 눈코 입이 또렷하게 보였다. 부채질을 해주며 할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랑 전래되어 오는 규칙적인 리듬의 노래-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서 나오는 노동요와 비슷한-를 불러주셨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할머니를 붙잡던 손은 차츰 느슨해지고, 할머니의 노랫소리가 저 멀리 아득해진다.. 그리고 내 머릿속은 보라색으로 물들며 꿈나라로 간다.

어린 날 여름날 외갓집에서 보낸 밤의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고단한 딸과의 수고로움이 어느덧 흘러 정갈히 나이 들어가는 할머니가 되어가는 날을 상상해 본다.

내 곁의 지효도 조금은 더 편하게 세상을 만나 우리 힘들었지만 행복했노라며 이야기 나누는 잠자리를 꿈꿔본다.


계절은 지금보다 조금 이른 초여름 어느 날,

풀벌레와 개구리가 울어대기 시작하는,

선선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보름의 달이 창밖을 훤히 비쳐주면 좋겠다.

그리고 장소는 여전히 여기 지효네 안방이길 바란다.


그날, 지효가 오늘 엄마와 누워 잠들던 여름날을 기억해 이야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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