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

by 지효네

매일 밤 갈등한다. 분홍색 작은 알약을 들고 고민에 빠진다. 들고만 있어 볼까? 아니면 반만 먹어볼까? 그냥 맘 편히 한알 다 먹을까?

그러다 이내 그렇게 버티다 새워 버린 밤이 가져올 내일의 고통에 멈칫한다.

내게는 불면의 밤보다 무서운 것은 가혹한 꿈이다. 매일 꿈에서 나는 엄마와 싸운다.

반백 년을 살아 내었는데, 고작 그 작은 기억들의 파편을 지우지 못하고 여전히 정수리를 무릎에 처박고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이런 나도, 그리고 그랬던 엄마도 모두 이해가 되지 않는 밤이다.

어쩌면, 나는 엄마를 꼭 닮았다. 애쓰지 않아도 너무나 완벽하게 같다. 다른 모습으로.


혼자 누릴 수 있는 밤을 가졌는데도 서성이는 버릇은 여전하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읽겠다고 고른 책을 옆에 두고는 떠오르는 생각에 참지 못하고 키보드를 만지작 거린다.

그렇게 원했던 고요와 침묵을 스스로 깨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결국엔 책상에 앉는 대신 따뜻한 보리차를 끓이는 것으로 밤을 갈무리한다.

빨리 끓여내려 제일 센 가스불에 덥혀진 주전자는 손잡이 마저 뜨겁다. 폴폴 김을 내는 보리차 한잔이 밤중의 소란을 드디어 잠재운다.

제 몸을 덥히다 못해 뜨겁게 데쳐내어 변장한 물은 축축한 김이 되어 밤공기를 덥힌다.

콧속에 보리차 냄새가 잔잔하게 베이며 따뜻해진다.


나이를 들어가는 것이 좋다. 작은 일에 찌그러지고 푸닥거리던 마음의 파도들이 잔잔해지는 경험들이 쌓여가면서 마치 다음번 태풍엔 안전할 거라는 쿠폰 하나를 얻어가는 느낌이 든다. 다만 그 울그락 불그락했던 내 몸과 마음도 다 젊어서 가능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이가 드는 것은 힘도 빠지는 일이구나 싶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앉는다. 곱게 나이 든 언니에게 비결을 물어보니 크림을 얇게 여러 번 바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대충 흘려듣는 척 해 놓고는 나도 해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크림 뚜껑을 연다.

얇게 펴 바르고 다 흡수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했는데 그 길지 않을 몇 분이 하세월이라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나이가 들어서 좋다고 해 놓고는, 얼굴에 그리고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세상을 살아낸 증거는 이토록 감추고 싶어서 난리다.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인간다운 나 일지도 모르겠다.


가을의 햇살이 연일 계속되는 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지겹게 내린 비에 우울하고 지쳤다며 이제 고만 오라고 하소연을 하며 푸념하던 것이 오늘 낮의 일일진대,

비가 멈추고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창밖의 가을밤 소리가 왠지 서운하다.

지붕에 떨어지던 그 타탁 타닥 하다 못해 투투투투 하던 소란했던 물소리가 또다시 그리워지는 것이 비 오는 날들에게 꽤나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인간은, 아니 나는 꽤나 간사하면서도 또 꽤나 정스러운 동물인 게다.


길어진 발톱을 깎아 달라고 시위하며 발톱을 물어뜯던 쿠키의 번잡함도 고요로 바뀌었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네다리를 옆으로 뉘어 모로 뻗고는 쌕쌕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렇게 나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쿠키의 배를 바라보며 오늘도 순간의 고통들을 잊어낸다.

괜찮지가 않았던들, 괜찮았다고 한들 애석하게도 모두 내 삶의 모습이다.


내 곁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잠자고 있는 나와 다른 생명체와 이 밤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되었다.

나는 괜찮지가 않아도 또 괜찮아도 다 괜찮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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