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도 맛있기만 하더라
그 때는 우리가 어렸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품은 의미를 동경하며 좋아한다 말했지만, 스스로 좋아하는 참 여행이란 어떤 것인가 잘 알지도 못했다.
가을이라 절정에 이른 단풍을 배경에 두고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은 마음에 떠나고 싶었다. 가을에 단풍 관광이라,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굼떠지는 신랑(당시 남자친구)을 꼬실 건덕지로 '전라도'를 들이밀이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맛의 고장 전라도가 아닌가! 고추장하면 순창, 떡갈비하면 담양! 그렇게 순창 거쳐 담양 찍고 온다는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소셜커머스에 번쩍이며 떠오른 가을 특판 상품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줄지은 관광버스에 단풍처럼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챙겨입고 온 어른들 사이에 섞여 출발할 때만 해도 미처 몰랐다. 고속버스 휴게소 들리듯, 목적지에 닿으면 "몇 시까지 오세요"하고 흩어지는 단순 배달형 관광객 몰이일줄은.
떠오르는 해를 따라 한참을 달려 마침내 전라도로 진입했고 순창 중에서도 한참 산중으로 들어가 강천산 트래킹 코스에 닿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전라도인지, 순창인지, 딱히 느낄새도 없이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관광객이 버글거리는 단풍산의 한 가운데였다.
단풍 구경하고 점심까지 먹고 버스로 돌아오라는 시간은 촉박했다. 어디 맛집을 찾아가기에는 택도 없었다. 그러니 점심 한 끼 기대하고 끌려온 이의 손을 잡고 단풍 구경에 나서기에는 영 미안했다. 그래도 이보게, 나는 당신의 희망이지 않소. (나는 여지껏 그의 휴대폰에 '나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 시간만으로 좋지 아니하겠소, 하는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살폈다고 하기에 사진 속의 나는 그저 너무나도 신이 나 보이는구나.
단풍 구경하고 내려 와, 등산길 초입에 있는 식당가를 둘러봤다. 누가 봐도 순전히 등산객이나 관광객 상대로 장사하는 가게들.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제일 먼저 눈에 드는 것은 단풍 구경꾼들의 발길로 한 몫 잡으려면 회전률을 높여야 할테고, 그런 이유로 짐작되는 식탁에 깔려진 얇은 비닐. "아무거나 주세요."하는 뉘앙스로 제육볶음 2인분을 시키는 그의 목소리에 아무런 기대도 담기지 않았을거다.
그런데 이게 왠일이야. 그러니까 여기는 전라도였던 것이다. '데이트 in 부산'이라는 블로그 운영하며 맛집 좀 다녀봤다고 깝쳤던 경상도에서 온 어린 커플의 눈앞에 불현듯 차려진 한 상.
반찬이 예사롭지 않았다. 제각각 참기름내를 꼬숩게 입고 있었고, 간도 어찌나 착착 감기게 맞는지. 특히, 김치는 놀라웠다. 식당 김치는 예사로 중국산일거다는 편견을 와장창 깨고 톡톡 터지던 유산균. 더 주십사 청하니, 진작에 더 내어줄 것을 그랬다며 꽉 찬 그릇을 내미셨다. 이럴 때, 그 장면 하나로 우리는 그 식당 인심 좋았다고 기억하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된장은 또 어땠나. 신랑과 나는 아직도 그 날의 맛을 떠올릴 때, '김치부터 된장까지' 맛있었다고 말한다. 찌개 뚝배기에 담겨 나왔지만, 슴슴한 국에 가까웠다. 무가 잔뜩 들어 시원하고 단맛이 인상적이었는데 흔히 먹던 맛이 아니라 낯설었기에 더욱 인상적으로 기억된다.
제육은 '두루치기 쫌 하는'이와 먹었으니 엄지를 치켜들 수는 없었다. 고기가 조금 질겼는데 그건 선도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 부위를 좀 더 얇게 썰었으면 좋았을텐데 두텁게 썰어 써서 그랬다는 평을 했다고 오랜 기록에 남아있다. 어쨌든 양념 맛으로 쌈 싸서 푸지게 먹었다는 기록도 함께.
트래킹 코스 초입의 어느 식당인지 간판은 전혀 기억도 안나요. (아마 당시에는 기억할 의지도 없었을거에요.)
다만 1인분에 1만원도 안하는 가격이었던가, 맛과 차림에 비해 터무니 없었던 가격에 두 번 감동한 기억이 나요. 관광지인데도 말이죠.
우리는 이 날 이후로, '전라도는 전라도'라 동경하며, '김밥천국에서도 팔첩반상이 나온다'는 설에 사뭇 진지해지는 경상도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