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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하 Apr 02. 2024

Killer or Dreamer



끝이 없이 넓은 지하실을 헤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지하 주차장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각진 시멘트 기둥들이 서 있었고, 그 기둥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해먹들이 묶여 있었다. 그 해먹은 마치 누에고치처럼 무언가를 꽁꽁 싸매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것들이 모두 시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그리 친하지 않았던 친구에서부터 유명한 작가, 디자이너, 예술가들까지 다양한 시체들 사이에서 나는 출구를 찾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헤매었다. 직관적인 성격 덕에 그 꿈의 의미를 나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그 시체들은 이제껏 조용히 죽여온 나의 꿈들이란 걸.


이 꿈을 꾸었을 당시 나는 24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진로를 다시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행복한지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그런데  꿈의 의미를 알고 나서 나에게 많은 꿈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종종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던 어린 시절 나는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꿈에 새겼고, 미디어 속의 예술가들을 선망하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렸다. 그리 친하지 않은 고등학교 친구를 멀리서 바라보며 저렇게 똑똑하고 착하고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그 모든 사람들이 나의 꿈이 되어 내 무의식 속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고 있었나 보다.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며 단 한 문장씩의 이유들로 너무도 쉽게 그들을 죽여왔다.


좀비라도 되어 날뛸까 걱정이 되었는지 해먹으로 꽁꽁 싸매어 놓고는, 왜 썩지도 못하게 차가운 지하실에 매달아 놨을까? 그보다 나는 왜 그들이 죽었다고 단정 지었을까? 정말 그들이 죽었든 안 죽었든 나는 그렇게 여길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24살의 나에겐 그들은 너무 허무맹랑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내 마음속에 멋진 그들이 살고 있고, 그들을 지하실에서 꺼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용기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실패할까 봐 두려웠다. 분수에도 안 맞는 꿈을 꾸었던 사람이 될까 봐. 그러니 그 해먹들을 뒤로하고 지하실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제 30대가 되었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 해먹들을 의식하고 있다. 다만 그들이 죽었다고 단정 짓진 않기로 했다. 그저 사라지지 않고 지하실에 계속 매달려 있는 이유가 있겠거니 넘겨짚기로 했다. 그들이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겼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이상하게도 가끔씩 해먹들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곤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해먹에 싸인 시체들이었는지, 때를 기다리는 번데기들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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