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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오렌지 Jul 10. 2020

그렇게 중년이 되어간다.

그래도 괜찮아.

어느 날 책을 보고 있는 나에게 딸아이가 " 엄마, 책 읽을 때 그렇게 꼭 침을 묻혀야 해?" 그제 서야 내가 한 장 한 장 침을 묻히고 책을 넘기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갑자기 어릴 때 나도 엄마에게 이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내가 그때 엄마 나이구나. 요즘은 손끝에 수분이 하나도 없어서 의식하지 못하며 침을 묻힐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구나. 우리 엄마는 그러신다. 나중에는 혀도 마른다고.

올해부터 신체적으로 이유 없이 아프기도 하고 작은거에 서운하기도 하다. 이렇게 중년이 되어가는 건가?  하고 있는 요즘 서점에서 책 한 권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중년이 된다> 중년...49살의 이 저자는 여성이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스치듯 비쳤던 전신 거울에서 구부정하고 통통한 영감을 보게 된다. 통통한 아줌마가 아니고 베에지색의 아무 디자인도 없는 파자마에 쇼트커트를 하고 살집이 있어 보이는 영감의 모습이 자신이라는 걸 안 그날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쓰여 있다. 아줌마라는 걸 알지만 처음으로 아줌마라고 불려진 날의 서러움은 아마 중년의 여성이라면 다 알 것이다. 나도 딸아이를 안고 있는데 누가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에도 전혀 돌아볼 생각조차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부름이 나라는 걸 알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고스란히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요즘 나는 예전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많은 상황들이 어느 날 갑자기 수학 문제를 풀 듯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엄마들의 가방이 왜 뚱뚱해지는지 알게 됐다. 점점 필요한 물건들이 많아진다. 작지 않은 글도 안보이니 돋보기, 기미가 진해질까 겁나서 여름에는 양산도 필수,갑자기 땀이 나니 핸드 선풍기도 넣어야 하고 입이 자주 마르니 껌,사탕도 챙겨야지. 식후에 먹어야 할 영양제 등등. 또 왜 점점 머리 스타일이 짧아지는지도 알았다. 긴 머리스타일이 안 어울리기 시작하고 점점 푸석푸석해지면서 숱이 없어져 기를 수가 없다. 왜 목소리가 커지는 지도 알았다. 내 귀가 점점 나빠져서 그렇단다. 상대방의 말을 왜 자주 끊는지도 알았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할 이야기를 까먹는다. 이렇듯 많은 상황들을 나도 겪으면서 이렇게 나이 들어 가나보다 하면서 문득문득 우울해 지기도 한다.


중년의 시기에는 부모님이 아프기 시작하여 돌보거나 돌아가시거나 자식이 있다면 진학이나 취업을 하는 등 생활에 있어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기도 하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 지나보다.

어느 날 나는 아빠께 전화 걸었다. 한참 신호음이 가는데 받질 않으셔서 끊으려고 할 때 아빠의 음성이 들렸다.

" 아빠, 왜 이렇게 늦게 받으세요?"

" 응, 우리 딸...요즘 아빠가 느림보가 되어가네. 딸 별 일 없어?"

" 네... 선영이가 사춘기라 퉁퉁 대는 거 빼고는 다 괜찮아요."

" 선영이? 선영이? 선영이가 누구지?"

" 아빠...아빠가 세상에세 제일 사랑하는 손녀 박선영이요! "

나의 아빠는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 몇 년 전 만에도 하루에 수십 번을 받았을 전화. 이제는 통화 버튼 키를 옆으로 미는 작은 동작조차 힘들어 하신다. 언젠가 아빠가 나를 보고 " 아줌마는 누구세요?" 이렇게 묻는 날이 올 것만 같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지만 나를 못 알아보는 날이 온다면 가슴이 무너져 버릴 것 같다.


중년이 너무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나이 들어간다는건 생각을 조금만 다르게 하면 그렇게 큰일이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1,2년 전부터 봄에 연둣빛의 나뭇잎이 너무 예뻐 보이고 단풍놀이 가는 게 이 세상에서 제일 이해 안 갔는데 아마 올 가을에는 단풍놀이를 갈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길가다 새 소리도 들리고 가만히 서서 그 새를 보기도 하고 이런 여유가 생겼다. 반면에 무리하게 무언가를 할 생각도 안 한다.밤을 새우는 일도 안 하고 손목이나 관절에 무리 안 가게 편리한 도구를 써서 나를 편하게도 해 준다. 중년은 무리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시기지만 이 나이가 되어 처음 터득한 것은 스스로를 조금 풀어주고 나를 아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은교> 영화속에 백발의 박해일씨의 대사 중에 "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받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는 벌이 아니다." 라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있는 젊음과 늙음, 거기에 죽음까지, 모두에게 주어지는 시간들이니 너무 들뜰 필요도 너무 서러워할 필요도 없을 듯 하다. 젊을 때의 에너지 넘치고 바쁘게 지냈던 나도 나고, 중년의 좀 둔하고 여유가 있는 나도 나이고, 더 굼 뗘지고 느긋한 백발의 노인이 될 나도 나이기 때문이다.

중년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대부분 하고 있다. 예전만큼 빨리하거나 그때만큼 잘하진 못할지는 모르지만 그럼 또 어떠한가. 예전에는 잘 해냈고,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기억으로 지금의 모든 게 괜찮아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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