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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오렌지 Jul 16. 2020

그럴 수 있어! 이해해!

사춘기 딸에게만 제외



송장이 벌써 세 번째 재출력 중이다. 대표님이 월요일부터 쾡한 눈으로 프린터기를 째려보고 있다. 그러고는 쿨하게 " 내 잘못이야..." 송장 데이터의 뭔가를 잘못 입력한 눈치이다.

나는 대표님의 어깨를 치며

" 그럴 수 있어! 이해해요! 우리 나이에 그럴 수 있어요!"

이 일이 있은 후에 사무실에는 유행어처럼 " 그럴 수 있어! 이해해! " 의 말로 서로의 실수를 토닥여 준다.

어느 날 포장박스 주문 시기를 깜박했다. 자체 제작 박스라 바로 제작이 안 되는 품목이었는데 미쳐 챙기지 못했다. 나는 너무 당황했고 급하게 주문을 부탁드렸지만 하루 정도 배송이 펑크가 날 지경이었다. 그때 대표님이 " 그럴 수 있어. 하루 좀 놀지 모." 이렇게 외쳐주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다들 챙기지 못했다고, 요즘 너무 바빠서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내는데 한 번쯤은 그럴 수 있다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렇게 이 말을 내뱉어 버리면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이해되는 것만 같고 별거 아닌 게 되는 느낌이다. 나도 이 말을 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년을 지나가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많은 상황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해서부터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세상살이에 너무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다고 늘 이해하려 한다고 하면서 사춘기 딸에게는 이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시험기간에 유독 잠이 많은 딸에게 " 그럴 수 있어. 성장기 청소년은 잠이 많아진대. 이해해!"

늦게까지 유튜브 보느라 새벽에 잘 때도 " 그럴 수 있어. 학원 숙제 끝나고 한두 시간 유튜브 보면 그 시간이지 모. 이해해!" 하루에도 열두 번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딸을 보면서도 " 그럴 수 있어. 호르몬 영향이라잖아. 이해해!"


어느 날 딸은 시험 성적표를 가져왔다.

"국어.. 음.. 주관식이 다들 어려웠다니,그럴 수 있지! 과학.. 음.. 전형적인 문과 머리로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럴 수 있어. 사회.. 음.. 그럴 수 있...... 니?? 47점? 미친 거 아냐? 전날 한 번만 교과서 읽었어도 이 점수는 안 나오겠다!" 딸에게는 이 문장 한마디로 늘 이해할 수는 없나 보다.

나는 중년을 지나고 있는 중이고 내 딸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갱년기가 사춘기를 이긴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 모녀는 승부를 내고 싶지는 않다.

서로가 조심하면서 사과하는 단계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중년인 나는 여중생의 친구관계가 이해 안 가고 여중생인 딸은 엄마의 뱃살을 이해 못한다.

중년인 나는 새로운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려 하고 지인들과의 시간만 고집한다. 그러니 사람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다. 그 반면에 사춘기 여중생들은 친구들의 눈빛이나 카톡의 단어 선택조차에도 예민함에 극치이다. 그때마다 별거 아니라고 아무 뜻 없는 눈빛, 단어라고 말했다가는 딸아이와 이틀 정도의 대화시간은 날아간다. 그때는 그저 "어머, 진짜?" 듣고만 있을 뿐이다. 물론 속으론 백만 가지 말들을 하지만.


내가 어릴 때 목욕탕에서 아줌마들의 뱃살을 봤을 때, 다 게으르고 운동을 안 해서 그럴 거라며 나는 아줌마 돼서도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했다. 딸아이가 내 뱃살을 보는 눈빛에서 내가 어릴 때 아줌마들을 보며 던졌던 그 눈빛을 보았다. " 엄마는 왜 운동 안 해?" 이 말에 ' 회사 갔다 와서 집안일하고 나면 바로 잠이 쏟아진단다. 회사에서 앉아만 있고 점심시간에 먹는 밥은 내가 한 밥이 아니라 너무나도 맛있어 한 그릇도 모자란단다. 왜 그런지 모르게 배랑 팔뚝에 누가 살을 붙이는 거 같아. 운동을 한다고 조금만 뛰면 식욕이 더 폭발하네. 너도 나이 들어 봐라! '라고 속으로는 꼰대 같은 말을 생각하지만 정작 내뱉는 말은 " 이제 운동해야지. 뺄 거야."

할많하않 ( 할 말은 많으나 하지 않겠음)

 


 

이렇게 하루에도 여러 번 두 여자는 각기 다른 호르몬의 영향으로 부딪힌다. 그때마다 어릴 적 딸아이 사진을 보면서 이때 나에게 주었던 행복과 웃음의 기억으로 지금 속상한 마음을 보상받고 있다.

해맑은 미소의 어린 딸 사진으로 사춘기 호르몬을 덮어버리고 있는 중인 것이다.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해 결국 화나는 내 마음을 멈추게 하는 한마디.

" 그럴 수 있어! 이해해!"

오늘부터 다시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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