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사랑에 대하여
왜 사람은 사랑을 갈구하는가? 그리고 다수의 사람은 사랑을 갈구할수록 더 고립되는가? 현재는 사랑이 넘쳐 보이는 시대다. 밸런타인데이 등의 수많은 기념일, 성공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들, 개수를 헤아리기 힘든 데이팅 앱의 범람, 사랑을 예찬하는 여러 대중가요까지.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둘러싸여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외롭고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인은 사랑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착각한다. 사랑할 줄은 알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 진정한 사랑을 못 한다는 현대인의 핑계가 이를 증명한다. 사랑을 낭만적이고 이상적으로 그릴 수도 있지만 사랑은 우연히 빠지는 감정의 늪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참여하는 훈련이다.
현대인의 사랑은 자본주의적 성격과 결합하여 시장 지향적인 모습을 띤다. 자신의 인격조차 상품으로 내놓고 교환 가치가 맞는 상대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외모, 재력, 스펙, 성 등을 따져 시장에서 가장 가치가 높을 때 팔겠다는 것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교환 관계로서의 사랑이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심리와 시장 논리가 팽배했을 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인 무조건적 증여가 어떻게 파괴되는지 보게 된다. 이에 더하여 이기성을 넘은 이기주의의 확장이 일어난다. 타인의 세계에는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면서, 오직 연인 한 사람에게만 집착적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이를 사랑이라 칭하지만 사랑보단 공생적 결합이다. 홀로 서지 못하는 두 존재가 서로에게 기생하여 불안을 해소하려는 병리적 현상이다. ‘넌 내 것’이라는 말 안에 얼마나 많은 배타주의와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들 모두 사랑이 아니라 고독을 소비할 뿐이다.
사랑은 명사에 가까울까 아니면 동사에 가까울까? ‘사랑에 빠진다.’라는 표현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문장 안에는 수동성의 함정이 숨어있다. 사랑을 갑작스러운 벼락으로 보고 지속적인 행위의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다. 주는 것의 개념이 모자란 나머지 준다는 행위를 잠재력의 발현이자 생명력의 과시가 아니라 박탈로 규정한다. 프롬이 사랑은 기술이라 정의한 것을 충실히 따르면 사랑도 훈련이 필요하다. 단순한 열정이 아닌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 결합한 형태의 사랑을 제안한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마법같이 운명적 존재를 만나 유지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매 순간 결단해야 하는 고도의 집중력과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 사랑이다.
이기주의가 확대되면 배타주의가 된다. 일정 정도의 배타성은 연인 관계에 필요하지만,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존재에게 무관심한 편중이 심화하면 그것에 사랑이라 이름 붙이기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아깝다. 하여 가장 기본적이고 기저에 깔려야 할 사랑은 형제애다. 동등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연대감으로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생각을 따르면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다. 시선의 확장이자 나와 완전히 다른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세계가 균열하고 성장하는 경험이다. 이 명제를 생각할 때 외롭고 심심한데 연애나 할까 하는 말은 인간을 목적보다 수단으로 여기는 것에 가깝다. 이성 간의 연애를 넘어, 소외된 이웃, 낯선 타인, 나아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는 마음 또한 사랑의 가장 숭고한 형태이자 경건이다. 또한 현대의 혐오와 냉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서의 감정이 된다.
낭만적 환상을 걷어낸 자리에 남는 것은 반짝이는 설렘이 아니라 묵직한 책임과 의지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말고 사랑하기 위해 훈련해야 한다. 나르시시즘의 감옥을 깨고 나와 타인에게 손 내미는 행위, 그것이 바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자유다. 삶을 사랑하는 태도로의 복귀는 관계의 불편함을 전제한다. 진정한 사랑은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세상의 지평선 위에 있다. 우리는 연인과 마주 앉아 말을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고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