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쿵쿵거릴 정도의 떨리는 호박죽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호박죽을 확실히 먹어봤다. 그 맛은 결혼을 넉 달여 앞둔 2012년 가을 찾아왔다.
그 무렵 나는 웨딩드레스에 걸맞은 몸이 되기 위해 퇴근 후 한 시간씩 필라테스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 가기 전 간단하게라도 요기를 했는데 집 근처 국숫집에 종종 들렀다. 통영 다시 멸치로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고, 김치와 고춧가루도 모두 국산을 사용해 믿음이 가는 가게였다.
그 날은 멸치국수가 아닌 비빔국수를 시켰다. 후루룩후루룩 면치기를 하고 있었는데 달콤한 냄새가 폴폴 내 자리까지 풍겼다. 주방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던 여사장님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성님 나요. 머하소? 나가 늙은 호박에 찹쌀 듬뿍 너서 호박죽을 겁나게 마~싰게 끓였소. 아야, 들통으로 하나 가득 팔팔 끓였당께. 걱정 말고 얼릉 퍼가쇼! 언능!"
내 귀를 파고드는 단어, 호.박.죽.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호박죽을 좋아하는 나로선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가게 안에 손님은 나 혼자. 죽은 들통으로 하나 가득 끓이셨다 하고…. 기다렸다.
"아가씨 죽 한그륵 하실라요?"
한 번만 물어봐주시기를. 그러면 그 은혜 잊지 않고 정말 맛있게 잘 먹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 대사는 상상 속에서만 메아리칠 뿐, 가게 안은 틀어놓은 TV 소리만 쟁쟁 울렸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내 마음은 아까보다 더 초조해졌다. 비빔국수가 거의 바닥을 드러낼 즈음 그 성님이란 분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따 동상~ 멀 자꼬 줘싼다요. 이 귀한 걸!"
"냉동실에 호박 얼려놨던 거 꺼내서 그냥 팍 쒀부렀소. 성님 이건 진짜 보약이요. 가져가 성님도 묵고 집이 아저씨도 한직 드시게 하요."
"아따 동상 고맙소~ 내 잘 묵을께."
사장님은 손이 큰 분이었다. 그분 몫으로 호박죽이 한 냄비나 돌아갔다. 그 모습을 초조하게 눈으로 좇았다. 나는 이미 비빔국수에 따라 나온 멸치육수까지 다 마시고 그릇 바닥에 붙은 김 조각을 하릴없이 집어 올리던 상태. 설상가상 사장님은 무슨 일이 갑자기 떠오른 듯 쌩하니 밖으로 나가셨다.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겨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저... 아주머니......"
주방 아주머니는 설거지하느라 정신이 없으신 듯했다.
"저기.... 아주머니!"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배에 힘을 주어 다시 불러봤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화들짝 뒤를 돌아보시더니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건네셨다.
"맛있게 드셨어요? 5천 원입니다."
'이.... 이게 아닌데.....'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천천히, 최대한 꾸물거리며 돈을 건넸다. 이윽고 말머리를 열었다.
"아주머니 근데요. 하...... 이게... 참..... 웃기고 면구스러운데요....."
아주머니는 내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몹시 궁금하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셨다. 눈을 질끈 감고 다음의 대사를 읊어버렸다.
"그.. 그러니까... 제가 호박죽을 정말 좋아해서 그러는데요... 많이 끓이셨다길래.... 그래서... 그 호박죽 제게 조금만 파실래요?!"
막상 말을 마치고 보니 너무 부끄러워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마 가게 안에 손님이 없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주머니는 재미있다는 듯 호호 웃으셨다.
"아이고 아가씨이~ 거 좀만 기다리믄 사장님 들어오시껀디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때마침 여사장님이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오셨다. 아주머니가 얼른 입을 여셨다.
"사장님! 여기 요 아가씨가 호박죽이 먹고싶딴디. 팔라고..."
아주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사장님은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시더니, 호탕하게 웃기 시작하셨다.
"으하하하하하! 아가씨 거 말 한 번 잘하셨소! 그래, 사람의 입이란 이렇게 말을 하라고 달려있는 거시요! 그래야 호박죽이라도 한 그륵 얻어먹지! 말을 안하믄 어찌 안다요? 모르제. 말 안했으믄 아줌니들 진짜 너무한다. 거 한번 먹어라 소릴 않네. 그러고 집에 갈뻔하지 않았소. 그러고 가면 거 잠잘 때 생각나요 아이고 그 죽~ 하면서. 아줌니 퍼뜩 요 아가씨한테 대접에 죽 한 그릇 가득 퍼주소!"
'앗, 앗싸!'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나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갓 끓인 따끈따끈한 호박죽이 마침내 내 앞으로 왔다. 호박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밝은 기운을 뿜어내는 진한 노란색에 그 노란색을 살짝 입은 하얀 새알이 동동 뜬 그림 같은 모습. 숟가락으로 죽을 봉긋하게 떠서 입으로 후후 불었다. 호박죽의 달콤한 풍미가 코를 자극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입을 우물거리다 그것을 삼켰다. 눈 깜짝할 사이 사르르 목구멍으로 스며들며 미뢰에 달콤함이 전달되었다. 굳이 웃으려 한 것도 아닌데 '후후훗' 웃음이 나왔다. 머릿속에서 노란 호박꽃이 활짝 피는 느낌이었다.
"그래.. 사람은 입을 달고 있으면 이렇게 말을 해야제. 말을 해야 얻어먹지! 암! 아가씨 어딜 가도 굶진 않겠소! 으하하하하하하!"
호박죽을 떠올리면 그때가 떠오른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대사(大事)를 앞두고 느꼈던 행복하기도 두렵기도 했던 감정. 퇴근 후 혼밥이 예사였던, 그러나 고독이 싫지 않던 그 시절. 그깟 호박죽이 뭐라고 그리도 초조해하며 갈구했던가. 주저하는 마음을 어렵사리 표현했을 때 쾌히 '이러라고 입이 달려있는 거'라며 죽을 가득 주셨던 푸근한 정. 사장님 말마따나 '입을 움직인 덕'에 맛볼 수 있던 엄청나게 황홀했던 호박죽의 맛.
음식에는 언제나 추억이라는 양념이 짙게 배어 있다. 그 추억의 감칠맛 때문에 더 맛있고 진하게 뇌리와 가슴에 기억된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쓰다 보니 "어딜 가도 굶진 않겠다"는 사장님의 말씀이 떠올라 웃음이 차오른다. 사장님의 말씀이 예언이 됐는지 지금껏 굶지 않고 아니, 심지어는 음식을 업으로 삼아 오늘도 맛있게 살고 있습니다. 제게 맛있는 정을 일깨워주신 이수역 국숫집 사장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