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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희 Nov 12. 2019

외할머니의 쇠고기산적



 매일을 요리수업과 씨름하다 드디어 짬이 어느 날. 미뤄오던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만으로도 20권 이상, 미야베 미유키와 무라카미 하루키 10권 이상, 박완서와 기리노 나쓰오 거의 10권. 거기다 각국 작가들의 인문, 추리, 로맨스, 심리 그 외의 장르까지 포함했더니...... 엄청난 숫자였다.


 그래도 모두가 잠든 까만 밤, 책 속에 파묻혀 있으니 너무나 행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한 권 한 권에는 작가의 영혼이 담겨있고, 그것을 읽던 당시의 추억담겨있으니까. 분명 정리를 하려고 책장 앞에 앉았는데 나는 지나간 책을 들추며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사놓고 끝을 못 맺은 책 한 권이 손끝에 걸렸다. 오가와 이토의 <달팽이 식당>.


 열다섯에 집을 나와 외할머니와 생활하던 린코. 린코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외할머니가 10년 전 돌아가시고 의지하던 남자 친구까지 변심해 린코는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다시 찾은 고향에서 린코는 '달팽이 식당'을 연다.


 린코를 요리의 세계로 이끈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삶을 정성스럽게 대했던 할머니는 요리 역시 섬세하고 자상하게 다뤘다. 요리를 만들 때 그 과정을 말로 설명하기보다 린코가 하나하나 을 보도록 해주었다. 씹을 때의 질감과 혀에 닿는 감촉, 소금의 양 등을 혀로 익히도록 도와주었다.


 린코의 이야기에 천천히 빠져들고 있자니 린코처럼 내게도 크나큰 존재였던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됐다.


 고등학1학년 가을이었을 것이. 외할머니댁갔더니 무슨 날도 아닌데 부엌 한편에 대나무로 만든 꼬치에 꿴 쇠고기 산적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어제 누구 제사였어요? 고기산적이 이렇게 많아요?"


 "너 온다고 행 조금 만들었져."


  명절이나 제삿날 상에 올리는 제주 전통 방식의 고기 산적.  외할머니 손에서 만들어지는 뭉툭하고 짧은 산적을 나는 좋아했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셨는지 할머니는 꿰어있던 꽂이에서 고기 한 점을 ,  속으로 쏙 밀어 넣어주셨다.


 "먹을 때마다 참 신기한 게  고기산적 모양은 짤뚱하니 맛있게 안 생겼는데 참 맛나."


 "냐? 밥에 먹으라. 짜다."


 할머니는 전기밥통을 열어 그릇에 밥을 푹 퍼주셨다. 냉장고에서 꽈리고추 넣은 멸치볶음도 꺼내고 열무김치도 내주셨다.


 "할머니 산적은 엄마 거랑은 맛이 좀 달라요. 고기가 질긴 듯한데 맛이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하나?"


 "추렴한 고기난 그럴거여."


 고기가 귀하던 시절, 제주에선 지금처럼 정육점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추렴'해 나눈 고기로 집안행사를 치르고 온가족이 영양 보충을 했다. 추렴이란 여러 명이 소나 돼지를 한 마리 사서 도축을 하고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말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공동구매'로 해석될 것이다. 추렴은 명절이나 잔칫날 같은 특별한 날 이뤄졌으나 꼭 잔치 때가 아니어도 마음 맞는 사람이나 친척끼리 추렴을 해서 소나 돼지를 잡았다.


 추렴한 고기는 손질된 형태가 아니었기에 일일이 손 보려면 시간과 품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싸고 양이 많은 데다 야생의 깊은 맛이 강했다.


 "할머니, 나는 추렴한 고기가 그렇게 맛나더라고요. 근데 누구네 잔치 있었어요?"


 "아니, 작은 하르방이 주선해서 추렴하데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하다고 해서 같이 했주. 어제 그제 고기 다듬느라 네 할아버지랑 진땀깨나 뺐단다."


 "작은할아버지 덕분에 내 입이 호강하네요?"


 밥그릇을 내밀자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밥을 더 퍼주셨다. 산적도 더 줄까, 물어보셔서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는 가리는 게 참 많은데 민희 너는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으니 참 보기 좋아."


 "맞아, 엄마는 못 먹는 게 정말 많아요. 설렁탕에 운 파랑 고추도 못 먹고 추어탕도 못 먹고 그 맛있는 콩잎도 먹을 줄 모르고."


 "네가 갸를 안 닮고 느 애비 식성을 닮아 얼마나 다행이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걱우걱 더 맛있게 먹어댔다.


 "할머니! 나중에 이 고기산적 만드는 법 알려주세요."


 "학생이 배워서 뭐하게? 먹고플 때마다 할망이 만들어주면 되쥬."


 "얼마 전에 미국 소설에서 봤는데 손녀가 할머니한테 쿠키 만드는 걸 배우더라고요. 그리고선 할머니 보고 싶을 때마다 쿠키를 만들어 먹던데 나도 저렇게 해야지 했어요."


 외할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는 듯하더니 "나중에 꼭 가르쳐주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 손에 내 손을 갖다 댔다. 하지만 그 날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금도 할머니를 떠올리면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하루하루가 방울방울 되살아난다. 곱게 팥죽을 쒀주신다고 체에 삶은 팥을 올려 걸러내던 할머니의 주름이 도드라진 손, 귤 주스를 만들어주신다고 필사적으로 귤을 으깨던 할머니의 팔, 군데군데 보이던 하얀 반점. 맛있는 냄새를 따라 할머니 계신 부엌으로 슬그머니 다가가면 "간이 괜찮나?" 하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간을 보게 해주셨던 나의 할머니.


 외할머니는 뭐든 호기심을 갖고 달려드는 나를 어리다고 하여 괄시하지 않았다. 언제든 해볼 수 있게 배려해주셨고 어떤 얘기든 귀 기울여 들어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스무 해가 흘렀다. 선명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옅어지며 어떤 것들은 산산이 흩어지기도 한다. 그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이라도 오래 붙들고 싶어 오늘 이 글을 쓴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 영원히 붙들고 싶은 마음을 기록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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