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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ji 린지 Jan 07. 2020

도토리가 없는 떡갈나무④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한 당신에게 들려주는 동화소설

도토리가 없는 떡갈나무④






어린 떡갈나무는 요 며칠 무기력함에 빠져있었다. 잠을 푹 잘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온전히 깨어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동남풍인지 북서풍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맑은 날의 햇빛은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불안감에 콩닥콩닥 거릴 때마다 끈적한 식은땀이 흘렀다. 



몸에 난 구멍은 조금씩 커졌는데 어린 떡갈나무는 남의 일인 척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 구멍만 생각하면 초조해졌고 어지러웠다. 나이든 떡갈나무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어린 떡갈나무에게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온종일 걱정할 게 분명했다. 말이 걱정이지 잔소리와 구멍에 대한 아는 지식을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뭇가지를 늘여 뜨려 구멍을 어찌어찌 가려보기는 했으나 조금이라도 센 바람이 불면 난처했다. 

구멍이 난 방향이 어린 밤나무가 있는 쪽이라서 더 신경이 쓰였다. 밤나무 사이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면 마치 자신의 구멍을 발견하고 비웃는 것만 같았다.


-똑똑


어린 떡갈나무는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똑똑똑


그 소리는 자신의 밑동에서 들렸으며 그곳에는 아주 건방진 어린 다람쥐가 있었다. 


“······.”


어린 떡갈나무는 조용히 어린 다람쥐를 바라보았다. 

어린 다람쥐는 어린 떡갈나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갸우뚱거리며 자그마한 손을 살짝 움켜쥔 채 다시 한번 밑동을 두들겼다. 


-똑똑똑똑


“사과하러 온 것이라면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어서 가버려.”


어린 떡갈나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무슨 소리야?”


어린 다람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서는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깨어있었으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니. 못됐구나.”


어린 다람쥐는 나무 기둥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여기 있네!”


어린 다람쥐는 구멍을 발견하고 그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우와! 이렇게 좋은 곳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 넌 정말 욕심쟁이야-이야-이야-야-아-아······.!”


어린 다람쥐의 신이 난 목소리는 구멍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당장 나와!”


어린 떡갈나무는 구멍이 들통나자 부끄러움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아-아-!”


어린 다람쥐는 목소리가 울리는 작은 구멍이 하도 신기하여 연거푸 소리를 질렀다.

“아! 아아! 아! 우아-우아-아아-아······.”


“그만 좀 해!”


어린 다람쥐는 구멍에서 나와 쪼르르 땅으로 내려가더니 잠시 놓아두었던 도토리 두 알을 챙겼다. 

그리고서 다시 올라가 어린 떡갈나무의 구멍 안에 도토리를 던져 넣으며 말했다. 


“잠시 신세 좀 질게. 그렇다고 아주 잠깐은 아니고 긴긴 겨울 동안 말이야.”


“누구 맘대로?”


“쫓아낼 생각은 하지 마. 그렇다면 이 구멍 속을 더 깊게 갉아버릴 테니까.”


“당장 나가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다람쥐는 콧노래를 부르며 도토리를 데구르르 굴렸다. 도토리를 구멍의 가장 안쪽부터 쌓아 놓을 생각이었다. 어린 떡갈나무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에게 미안한 것이 또 있을 텐데!”


어린 다람쥐는 도토리 굴리는 것을 멈추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번뜩 생각이 들었는지 손바닥을 부딪치며 말했다. 


“아! 도토리가 없는 떡갈나무라고 말한 것?”


어린 다람쥐는 데구르르 구르며 깔깔거렸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잖아!”


어린 다람쥐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구멍 밖을 나서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널 찾아온 거라고.

넌 도토리가 없는 떡갈나무라서 욕심쟁이 청솔모 녀석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야.

덕분에 난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이곳에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지.”


“하지만 난 사과를 받아야겠어!”


“그럼 이렇게 하자.”


어린 다람쥐는 중요한 비밀이라도 전달하려는 듯 어린 떡갈나무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넌 이제 도토리도 ‘없는’ 떡갈나무가 아니라 도토리를 ‘간직한’ 떡갈나무로 살아가는 거야. 

물론 내가 여기 머무는 겨울 동안만이겠지만. 

네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다면 앞으로 평생 이 구멍에 도토리를 저장해 놔도 좋겠지. 

그렇게 된다면, 넌 평생 도토리를 ‘간직한’ 떡갈나무로 살아가는 거야. 

‘없는’ 것과 ‘간직한’ 것의 차이는 정말 크다고!”


어린 다람쥐는 그럴듯하게 둘러대더니 제법 어른인 척 떡갈나무를 쓰다듬었다. 

어린 떡갈나무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휑하니 슬픔으로 가득 찼던 몸의 구멍 속에 아직은 낯설지만 작고 따뜻한 온기와 도토리끼리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로 채워지자 이상하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건방진 어린 다람쥐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새벽이면 쏜살같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서 구멍에 날랐다. 그 덕분에 어린 떡갈나무는 더 피곤해졌다. 


“어서 일어나! 도토리를 찾으러 갈 시간이야!”


밤새 어린 떡갈나무의 구멍 속에서 잠을 잔 어린 다람쥐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내 도토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갉아버릴 테야!”


하는 농담을 던지고서는 깔깔거리며 구멍을 나섰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어린 떡갈나무의 구멍은 도토리로 가득 찼다. 모두 나이든 떡갈나무나 반대편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에게서 가져온 도토리들이었다. 


어린 떡갈나무는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만든 도토리가 아닌 다른 나무들의 도토리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서 밤에 자고 있는 어린 다람쥐에게 갑자기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건방진 다람쥐 녀석! 다 필요 없어! 당장 사라지란 말이야!”


그 소리를 듣고 꿀잠을 자고 있던 어린 다람쥐는 잠결에 대답했다.  


“하지만 난 여기가 마음에 드는 걸······.”


어린 다람쥐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른 채 미소를 띠며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말을 듣자 어린 떡갈나무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불안감으로 콩닥거리던 이전과는 분명 다른 기분이었다.     







*

차가운 바람에 말라버린 나뭇잎은 산을 가득 덮었고 나이든 떡갈나무들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말수가 줄어들었다. 


또 겨울이 오는군.

이럴 때 가장 부러운 건 소나무야. 저길 좀 보라고

아직도 새파랗구먼.

피곤하기도 하겠어. 제대로 쉴 수 없으니.

타고난 게야.

암, 타고난 게지.

난 좀 자야겠네.     


그리고 나이든 떡갈나무들은 조용해졌다. 아마 그들은 정말 따뜻한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온전히 잠에 들지도, 깨어있지도 않은 상태로 지내게 될 것이다. 


밤나무들은 마지막 밤송이를 털어내고 올해의 풍성한 열매 맺음을 자축했다. 다 함께 밤나무들의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가사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아- 밤나무여, 밤나무여. 오늘 작은 밤을 가졌다고 슬퍼하지 않아. 

내일은 더 큰 밤이 열릴 거야.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산의 순리······.”     


어린 밤나무는 어려운 단어에서 얼버무렸지만, 누구보다 뿌듯한 마음으로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어린 떡갈나무는 눈을 감고 안 듣는 척하며 밤나무들의 노래를 다 듣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밤나무들의 노래를 들을 때면 괜히 심술이 났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밤나무들의 노래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

어린 다람쥐는 온종일 나무 구멍에서 잠을 잤고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중얼거렸다.


“어휴. 정말 배고파. 도토리를 많이 모아둬서 천만다행이야.”


라고 말한 뒤 잠결에 도토리 한 알을 맛있게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 

어린 떡갈나무는 딱히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어린 다람쥐의 건방진 눈빛과 말투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깨워서 나뭇가지로 엉덩이를 찰싹 때린 뒤 내쫓고 싶었지만, 

구멍을 가득 채우는 그 보드랍고 따뜻한 숨결이 아주 조금 마음에 들었다.  


어린 다람쥐는 잠결에 뒤척였다.


-톡


그 바람에 어린 다람쥐가 쌓아둔 도토리 중 한 개가 어린 떡갈나무의 구멍 안쪽 작게 벌어진 나무 틈새로 콕-하고 박혔다. 

하지만 금세 잠이든 어린 떡갈나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 년 후, 어쩌면 수년이 더 흐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될지도 모른다.

간절한 것은 느리지만 정확하고 풍요롭다는 것을.

모든 것이 산의 순리대로 그렇게 잘, 아주 잘 흘러가고 있었다.




(도토리가 없는 떡갈나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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