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없는 시댁에 갈래요.
#3
갓 나온 송편을 진열대에 붓기 위해 덮개를 열 때, 혹은 손님에게 떡을 담아드리기 위해 덮개를 열 때, 지나가는 행인의 불쑥 들어오는 손.
그 손이 나의 '첫 빌런'이다.
'이때가 기회!'라며 사자가 먹다 만 고기를 탐내는 하이에나들도 아니고, 어느 순간 나타나서는 "먹어 볼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커녕, 아무 말도 없이 송편만 집어서 사라지는 빌런.
그나마 집어가며 "이따 올 거예요~"라고 하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으나, 그래도 본인이 하는 행동이 이상해보일 수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진열되어 있는, 판매해야 하는 상품의 떡을 아무 말도 없이 집어서 본인의 입으로 넣어버리는 사람들이.
백화점 시식코너를 떠올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식코너도 소비자가 먹어볼 수 있도록 따로 만들어 놓은 걸 먹는 것 아닌가?
여러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다 보니 급기야 '내가 이상한 건가?' 하고 상황을 생각해 봤다.
'길거리에 떡볶이를 판매하는 포장마차가 있다. 먹음직스러운 튀김들이 진열되어 있고, 아주머니는 열심히 떡볶이를 만들고 계신다.
그때, 지나가다가 그 튀김이 너무 맛있어 보여 하나를 집어 유유히 사라진다?'
이해는커녕, "이거 도둑 아니야?"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방안을 생각했다.
소비자로서 맛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하고, 판매자도 맛있는 떡을 홍보해야 하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더 이상 받지 않아야 하기에 생각해 낸 방안.
"시식 떡"을 따로 담아 놓자!
송편은 쫄깃하게 만들기 위해 날반죽으로 만든 후, 시루에 찐다.
시루에 찌다보면 압에 의해서 터져버리는 몇몇의 가냘픈 송편들이 있다.
이 송편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에 판매하지 못하는데, 이 송편을 활용해 "시식코너"를 만들기로 했다.
큰 도시락에 터져버린 떡을 담아 "시식을 해보시라~"고 권했고, 손님들은 눈치 보지 않고 맛볼 수 있어서 좋아하셨다.
"상품은 드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게 되니, 나도 야박한 판매자가 되지 않은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다.
손님도 좋고, 나도 스트레스받지 않아 좋았다.
우리 집 떡은 맛에는 자신 있었기 때문에 시식을 만드니 오히려 반응이 좋아 판매도 더 잘되었다.
먹어보신 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게 앞에서 "어머~ 너무 맛있다!", "안 달고 맛있네~", "어쩜 이렇게 쫄깃해~ 이 것 좀 드셔보세요~"하며 먹방을 해주시니, 자연스레 홍보가 되었다.
'이렇게 평화로워지는걸 왜 진작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바쁘게 장사를 하던 중, 그녀가 왔다.
내 '두 번째 빌런'.
친정엄마와 따님이었는지, 시어머님과 따님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관계까지 파악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았으니까.
어쨌든, 사연은 이랬다.
손님 : 떡 맛 좀 봐도 되나요?~
나 : 네~ 그럼요. 여기 시식떡 있으니 맛보세요~
손님 : 아니, 이거 말고 여기 이걸로 먹어볼게요.
나 : 네? 아, 그건 판매 상품이라 안되고, 여기 시식떡이 따로 있으니 이걸로 맛보시면 돼요~ 터졌을 뿐이지 맛은 똑같답니다.^^
손님 : 아.. 안되는데.. 그냥 이걸로 먹으면 안 돼요?
나 :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그건 판매용이라서요..^^;;
손님 : 그게 아니라, 우리 애가 임신을 해서 이쁜 것만 먹어야 돼요~~
나 : 예????? 아.. 네 그럼 그걸로 드세요.
20대 초반 정도에 장사하던 때에 있던 일이니, 이해가 안 되었던 건지.. 정말 임신을 하면 이쁜 떡만 먹어야 하는 건지.. 옆구리 터진 떡을 먹으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도 있는 건지..
30대 후반인 지금도 아이를 임신해 본 적이 없기에 아직 이해를 못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중학생정도 됐으려나?
엄마가 먹은 이쁜 떡처럼 중2병 없이 이쁘게 자랐길 바래본다.
장사를 하다 보면 '빌런'이 참 많다.
그런 표현을 쓰는 게 과하다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장사를 해보면 안다.
그렇기에 내 본 직업이 장사는 아니더라도 장사를 하시는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내 불같은 성격과는 다르게 컴플레인을 잘 걸지 못한다.
진상 짓은 더더욱.
아무래도 부모님이 장사를 하셨다 보니 부모님 생각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많은 빌런들이 있지만, 하나하나 다 열거한다면 단편 시리즈가 아닌 장편 시리즈가 될 지경이니 여기서 불만이었던 것들은 그만 훌훌 털어버리려 한다.
그래도 우리 집에 오신 손님들이었기에, 그 손님들 덕분에 우리 부모님이 자식들을 잘 먹이고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니까.
예전에는 그냥 화만 났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역지사지'가 잘된다.
그렇다고 다 이해하는 건 아니고.
.
.
.
다 이해하지 않은 김에 한마디만 해야겠다.
잘~~ 먹고 잘~~ 사세요!!
특히, 가족들 다 와서 시식떡 싹쓸이 하시고, 더 달라며 배 채우셨던 분들이요! (최대 빌런을 깜빡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