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소중해.
#4
친정 '떡집'에 찾아오신 빌런들도 힘들었지만, "자식이니까 당연히 도와야지"라는 부모님의 말이 나에게는 언젠가부터 큰 짐이 되어 어떠한 상황이래도 "나는 도와야 해"라는 '효녀병'이 걸린 것 같아 그게 참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오빠는 명절에도 바쁜 일 때문에 일을 돕지 못해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비우고 '출동'했다.
명절에 내가 부모님 일을 돕는 건 '나의 삶'이었다.
고3이어도 "고3인데 뭐."라는 마인드였기 때문에 당연히 일을 도와야 했고,
29살 때는 오른팔 인대가 50% 정도 끊어져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도, 명절에 일은 도와야 했다.
그 로봇 같은 딱딱한 팔로 송편을 열심히도 퍼 담았다.
웃프지만, 그게 재활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많이 좋아졌다. 하하.
작년 추석에는 장사를 시작하자마자, 지하 공장으로 내려가다 성인 키보다 높은 층고의 계단에서 굴렀다.
밑에 바로 기계가 있었기에 갈비뼈가 부딪히면 죽을 거란 생각에 그 짧은 시간에 몸을 회전했고, 엉덩이로 타일바닥에 착지했는데, 영 심상치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일을 돕고 밤 10시에 응급실에 갔었다.
다행히 금이 가거나 부러진 곳 없이, 충격에 의한 통증이라 주사와 약만 처방받았었다.
물론, 이때는 사위도 있고, 아들과 며느리도 있었기에 내가 일을 많이 하진 않을 때였고 모두들 많이 도와줘 자리를 지킨 정도였기에 진통제를 먹으며 참을 수 있었다.
'다쳤을 때도 일을 했단 말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할 수 있으니까 한 거였다.
쉬라고 하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할 생각도 없고, 정말 할 만해서 했다.
오히려 쉬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난 '효녀병'에 걸렸으니까.
"당연히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그 말이 내 마음 어딘가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서, 어느 순간 '부모님의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고 꼭 해드려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고, 힘든데도 하다 보니 "친정을 가는 것보다, 시댁을 가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을 해버린 것 같다.
'제사를 지내는 시댁'에서 일하는 많은 며느리님들의 고충도 모른 채.
그런데, 이런...
이런... 이런 일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니 하늘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시댁이 제사를 안 지냈다.
어머님이 음식을 준비하셔서 가끔 '성묘'는 가셨지만, 정해진 제사는 없었다.
'결혼했으니, 나는 시댁에서 어머님 일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핑계는 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히려 1+1으로 사위까지 딸려와 이 힘든 일에 적극 동참해야 했다.
어머님은 우리가 오기 전 많은 음식을 혼자 장만하시고, 내가 가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다 준비해 놓으시는 분이셨다.
결혼 후 거의 2~3년은 부엌에 설거지를 하러 들어간 일도 없었던 것 같다.
피곤하니 자라고, 부엌일은 내가 하는 게 편하니 쉬라고, 며느리에게 시킬 법도 한데 어머님 아버님은 나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여전히.
아들에게도 "힘드신 장인어른, 장모님 많이 도와드리고, 천천히 내려와도 돼~"라며 친절히 우리 집에 넘겨주셨다.
평소 싹싹하고 친절한 우리 남편은 장사를 매우 잘했고,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사위 또 왔네~~ 사위가 너~~ 무 이뻐"하며 나의 쌀쌀맞음을 다 커버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시댁에 갈래요"라는 꿈은 사라졌으나, 며느리에게 한없이 자상한 시부모님과 든든한 지원군 남편을 얻었다.
친정에서 시댁처럼 일을 하고, 시댁에 친정처럼 쉬러 가는 복 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시댁에 가는 걸 좋아하고, 내가 먼저 시댁에 가자고 한다.
가면 거실에 대자로 누워 티브이 보다가, 식사를 준비하시면 옆에서 조금 거들다가, 밥상을 차리고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아버님과 술 한잔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시댁에서의 하루이기에.
조금씩 부엌일을 도와드리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무래도 살림살이가 서툰 나는 섣불리 나서지는 못한다.
그리고 무뚝뚝한 며느리이기에 어머님께 애교를 부리며 먼저 다가가는 것도 잘 못한다.
그래도 시댁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기에(너무 이기적인가?), 1년에 3~4번은 시댁에 내려가서 최소 2박 3일은 눌러있다.
너무 거리가 멀기에 3~4번이지, 가까웠으면 1달에 한 번은 무조건 가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철없는 며느리는 이번 명절이 더 기다려진다.
왜냐하면 친정이 이제 떡집을 하지 않기에 시댁에 일~찍 내려갈 수 있어서 신났다.
시댁 먼저 가고, 친정에 가는 거라고 들었는데, 매번 우리 친정 일로 명절 당일에 겨우 가는 게 죄송스러웠기에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출발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시댁에 먼저 가 며칠을 있다 올 생각을 하니, 친정부모님이 걱정된다.
쓸쓸하진 않을지.. 맛있는 음식은 해 드시는지.
이놈의 효녀병.
이래도 난리, 저래도 난리다.
그래도 이젠 어느 곳이든 삶이 고단해 쉬고 싶을 때, 힐링이 필요할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그래서 난 이제,
.
.
.
“시댁도 가고, 친정도 갈래요.”
[명절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2024년 3월 말.
부모님이 떡집을 하는 마지막 날.
축하해 주기 위해 꽃다발을 사서 친정으로 갔다.
졸업이나 마찬가지니 노란 프리지어 꽃다발로 준비했다.
엄마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39년 동안 해왔던 일이기에, 이제 고생 안 해도 되니 시원하기도 하지만 섭섭하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시원 섭섭’.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에..
엄마가 떡집을 하면서 얼마나 악착같이 성실히 일했는지 알기에..
마지막 영업을 마치고, 가게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나니 그동안의 모습들이 그려지며 울컥했다.
마지막으로 가게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자며 엄마를 찍어주는데, 언제 이렇게 작아진 건지..
항상 든든하던 엄마는 어느새 왜소한 여인이 되어있었다.
사진을 찍고 그동안 고생했다며 엄마를 꼭 안아주는데 그 품이 너무 작았다.
예전엔 팔을 한 아름 벌려 안아도 손이 맞닿지 않을 정도로 큰 존재였는데, 언제 이렇게 작아서 내 팔이 한 바퀴를 돌고도 남는 건지..
그만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주책맞게 엄마도 가만있는데 딸이 엉엉 울다니..
그리고 부모님께 쓴 편지를 전달드렸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항상 존경했다고.
지금도 그날 내가 안았던 엄마의 품이 잊히지 않는다.
어렸을때는 거의 매일 안겨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주 엄마를 만나면 다시 꼭 안아줘야겠다.
아빠, 엄마. 고생하셨어요. 사랑합니다.
에필로그.
새벽에 시댁에 도착해 마지막 4편 글을 마무리 짓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내가 본 풍경은, 새우튀김이 먹고 싶다던 우리를 위해 새우 150마리의 껍질을 까고 계시는 어머님의 모습.
도와드리겠다고 해도 비린내 난다며 말리셨지만, 너무 많은 양이기에 남편과 나는 손을 걷어붙였고, 어머님은 그럼 내장을 따라고 했다.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제거하는데 처음 해보니 재밌기도 했고, 어머님의 수고스러움을 직접 체험해 보니 음식을 해달라고 하기가 죄송스러워졌다.
느닷없이 나는, 내장을 따면서 “드디어 소원이 이뤄졌어요~”라고 했다.
남편과 어머님은 무슨 소원인지 궁금해했고, 나는 또 망언을 했다.
“명절에 떡 안 팔고 음식 만드는 소원이요~”
어머님은 “음식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하시며, 내일 하루종일 튀겨봐야겠다며 웃으셨다.
나도 음식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들지 예상은 한다.
그래도 명절에 장을 보며 어떤 걸 해먹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볼 때 가장 부러웠기에, ‘소원성취’는 해보련다.
아마 내일이 되면, 다시는 ”명절에 음식 하고 싶다 “는 말은 하지 않게 되겠지?
그래도 좋다!
나의 두 번째 가족과 함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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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시리즈]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친정과 시댁을 둘 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보려 했어요.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조금이라도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모두 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