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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Nov 15. 2022

스펙터클한 스냅 체험기

파리의 안나 115

날이 밝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뜨자마자 창문 밖 날씨를 살폈다. 다행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맑은 날이었다. 그런데 임무 수행 후 아침을 먹을 때쯤 되니 먹구름이 가득했다. 약속은 1시 반이니 날이 곧 갤 거라고 믿으며 준비를 했다. 정말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말리고 갈아입을 옷까지 세팅해 둔 뒤 점심을 먹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이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1시쯤 집을 나섰는데 약하게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한테 왜 이러니 날씨야.


구름이 걷히면 금방 맑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안고 트로카데로에 도착했다. 그런데 비가 더 많이 왔다. 스냅을 찍어주시기로 한 분들을 만나 잠시 역 안에서 비를 피했다. 24살 세 명의 오빠들이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비가 그쳐 촬영을 위해 샤요궁으로 갔다. 그분들은 정말 렌즈도 길고 TV에서나 보던 전문가용 카메라를 사용하셨다. 나를 향한 세 개의 카메라 렌즈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뻘쭘히 혼자 서서 사진을 찍으려니 포즈도 표정도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그분들이 처음엔 원래 다 어색하다며 나를 위로해주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비가 쏟아지듯 내리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파리에 산 115일 중에 최고로 많은 비였다. 이미 신발과 바지는 모두 젖고 머리를 흩날리고 우산도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결국 샤요궁 밑에서 비를 피하다 내가 죄송하지만 다른 날 사진을 찍을 수 없냐고 부탁했다. 원래 3시간에 80유로인데 100유로를 드리겠다고 말했다. 오빠들은 편하신 대로 하라고 우선 30분 정도만 기다려보자고 했다.

난 그때 이미 멘털이 나가 있었다. 옷은 젖고, 화장은 번지고, 머리는 엉키고, 기분도 우울했다. 곧 비가 그치긴 했지만 사진을 찍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내일 다시 야외 촬영 약속을 잡고 지하철로 들어갔다. 집에 가고 싶었지만 실내 사진이라도 찍자며 라데팡스로 가자고 했다. 이미 난 멘붕이라 사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반 타의적으로 라데팡스에 도착해 화장실을 들렸다. 얼굴은 난장판이었다. 한숨이 계속 나오고 정신이 없었다. 신 개선문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흐려진 하늘에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 촬영도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라 그냥 카페에서 이야기나 하자고 하셔서 따라갔다. 라데팡스는 자주 왔지만 카페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무난히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자 세 명과 함께 카페라니. 조금 어색한 기운이 돌았지만 이런저런 질문을 해주셔서 금방 편해졌다. 좀 친해지면 사진 촬영이 쉬울까 싶어 더 편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내가 5시까지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해서 4시 20분쯤 헤어졌다.

역으로 혼자 걸어가는데 정신이 없었다. 오늘 내가 뭘 한 거지 싶었다. 비를 맞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주할 거야!!! 집에 도착하니 뚜왈렛은 이미 끝난 상황이었고 나는 이 스펙터클한 스냅 체험기를 친구에게 들려준 뒤 싱글 스냅사진을 검색해보았다. 그런데 별로 도움이 안 됐다. 다들 너무 어색해. 나도 저러겠지. 난 더 심하겠지. 내일은 어떡하지. 그냥 철판 깔고 열심히 해야겠다. 최대한 예쁜 척. 하. 왜 내가 내 돈을 내고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 거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저녁을 먹은 뒤엔 수기 작성에 몰두했다. 아마 공모전에 사진과 영상 제출은 불가능할 것 같다. 내일 스냅을 무사히 찍더라도 보정 본을 받으려면 한참이 걸리고 금, 토 미화 언니와 영상을 찍는다고 하더라도 편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 우선 수기에 내 모든 것을 걸어야겠다. 내일은 제발 해가 좀 나기를. 아니 흐려도 그러려니 할 테니 제발 비만 흩뿌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옷은 뭐 입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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