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16
밤새 잠을 못 잤다. 스냅 촬영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새벽 2시가 되도록 정신이 멀쩡했다. 아니 사실 멀쩡 하다기 보단 멍했다.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연락도 했다. 메일을 주고받기로 해놓고 한 번도 연락을 안 했던 현숙이, 곧 군대를 간다던 태양이, 곧 아르바이트를 갈 미래. 미래는 마침 일어난 상태라 몇 마디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밤을 새울 것 같아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마침 뚜왈렛도 7시 50분쯤 와서 수월하게 임무 수행을 하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다시 화장을 공들여하고 잘 넘어가지 않는 아침 식사를 했다. 점심에 굶을 수도 있으니 많이 먹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속에서 잘 안 받아줬다. 그만큼 내가 긴장을 한 건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11시 반이었다. 그런데 11시쯤 갑자기 날씨가 안 좋아졌다. 설마 오늘도 폭우를 맞아야 하는 건가 싶어 불길했다. 어쨌든 집을 나섰다. 조금 일찍 도착해 에펠탑을 바라보며 포즈를 구상하다 오빠들을 만났다. 그때부터 무슨 정신으로 찍었는지 모르겠다.
자연스러운 표정과 포즈를 취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냥 많이 웃으려고 노력했다. 에펠탑에서 한참 찍고 알렉산더 3세 다리까지 걸어가며 여러 풍경을 담았다. 그곳에서 샹젤리제로 갈까, 튈르리로 갈까 고민하다 튈르리로 향했다. 원래 내가 원한 코스는 뤽상부르 공원인데 이동하기까지 시간도 걸리고 이미 난 한 시간이 지났을 때부터 지쳐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즐겼지만, 계속해서 나를 찍어대는 세 대의 카메라 렌즈가 너무 싫었다. 세 시간이 이렇게 긴 줄 몰랐다. 두 시간 할 걸. 모델이 힘이 없으니 사진작가들도 힘들었을 거다. 어쨌든 튈르리에서 모든 촬영이 끝났다.
나는 당연히 같이 밥을 먹을 줄 알았는데 오빠들은 별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집에 가려고 했는데 다시 승훈 오빠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간단히 샌드위치로 때우고 싶었지만 세 시간 동안 밖에 있었더니 너무 추웠다. 실내로 들어가고 싶어 생 미셸 먹자골목 쪽으로 향했다. 진짜 많이 걸었다. 괜찮아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다들 힘들어 보였다. 그 와중에 내 반응이나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난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었는데. 내가 유일하게 불어를 할 줄 알아서 주문이나 부탁은 내 몫이었다. 이제 식당에 가서도 쫄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전채 요리로 먹은 니스식 샐러드는 맛있었지만 본식으로 고른 햄버거는 최악이었다. 빵도 딱딱하고 소스도 없고 고기는 왠지 찌꺼기를 갈아서 뭉쳐놓은 것 같았다. 사이드로 나온 감자튀김으로 배를 채우고 후식으로 고른 초콜릿 아이스크림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15유로에 이 정도면 만족해야지 뭐. 오빠들은 다 좋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이 인연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 전 스냅 비용으로 100유로를 드렸다. 이틀 동안 거의 반나절을 함께 보내고 사진도 수천 장 찍힌 것 같은데 100 유로면 엄청 저렴한 것 같아 만족스럽다.
빨리 보정된 사진과 원본을 받고 싶다. 할아버지께 이미 뚜왈렛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아 집에 급히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에 들어가 구경하고 나와 시청까지 걸어가서 헤어졌다. 집에 가는 길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잘 찍힌 거 맞나. 스냅을 촬영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모델이나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사진작가도 매우 힘든 직업이라는 점을 말이다. 난 앞으로 그냥 셀카나 찍어야겠다. 너무 힘들어. 즐거워야 하는데 돈 내고 고생한 기분이다.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겠지. 사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