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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Nov 18. 2022

참새와 방앗간

파리의 안나 118

밤새 승찬 오빠가 보정된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사진도 있었고, 나보다 옆에 서 있는 외국인이 더 예뻐 슬픈 사진도 있었다. 대부분 배경이 너무 밝고 흐려 내 얼굴 위주라 프랑스 파리 같지 않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 스냅을 찍을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냥 셀카나 찍으며 살자는 교훈을 얻었다.

그나저나 이번 주 할머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다. 매일 아침 부스스한 눈으로 방에 가면 “일어났니?” 혹은 “눈에 잠이 가득하네.”와 같은 말을 해주셨는데 요 근래 입을 떼지 않으신다. 몸에 열도 나는 것 같고, 다리를 접으실 때마다 많이 아파하셔서 걱정이다. 저러다 정말 갑자기 잘못되는 건 아닌가, 싶어 두렵다. 할머니 건강이 안 좋아지시니 할아버지도 기운이 많이 없어지셨다. 힘이 없는 두 분을 보고 있으면 속상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눈치도 조금 보이고. 착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에 나까지 덩달아 기운이 없었다.


그래도 아침 먹고 한 시간 반 정도 걸었다. 점심 후엔 수기를 작성할 예정이었다. 오늘 저녁엔 미화 언니와 에펠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오후까지는 집에만 있었다. 어제 한인회에서 내가 ‘다음 달부터는 일을 구할 거다’라고 말했던 걸 기억해두신 할아버지께서 알아본 곳이 있냐고 물으셨다. 그런 건 아니라고 하자 본인이 아는 식당에 말씀을 해주겠다고 하셨다. 솔직히 별 다른 기대 없이 ‘그럼 좋죠.’했다. 열심히 수기를 작성하고 있는데 기운 없는 할아버지께서 유로 마트에 가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혹시 살 것이 많은 지 묻고는 지금은 조금 곤란하다고 말씀드렸다. 알았다며 혼자 터덜터덜 나가는 할아버지를 보니 너무 죄송했다. 하지만 나에겐 수기 작성도 중요한 일이었다.


한참 뒤 할아버지께서 전화 좀 달라는 연락을 하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연락드리니 나온 김에 식당에 가 물어보았는데 마침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 얼른 바지만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장도 같이 보러 가지 않는 내가 뭐가 예쁘다고 직접 식당에까지 가셔서 물어보셨는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참새와 방앗간’이라는 한식당이었다.


할아버지를 만나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 이모 두 분이 나오셨다. 자매라고 한다. 인사를 드리고 간단히 일하는 시간에 대해 설명을 들은 뒤 내일모레 일요일 11시에 나와서 일하는 걸 배우라고 하셨다. 기분 좋게 인사드리고 메뉴판을 하나 받아서 집에 왔다. 이렇게 쉽게 일을 구하게 되다니. 미용실은 할머니 덕분에, 식당은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참 남의 덕을 많이 보고 사는 것 같다.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에 마트에 가자고 말씀드렸지만 살 것이 많지 않으니 나중에 가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일 아침 먹고 가기로 하고, 공모전에 제출할 수기를 쓰느라 처음에 따라나서지 못한 것이라 말씀드렸다.


집에 돌아와 수기를 더 보충해서 쓰고 저녁 7시쯤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30분 전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해서 걱정이었다. 언니와 간단히 영상 하나를 찍고,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에꼴 밀리테흐 역 앞 까르푸까지 갔다가 다시 비가 쏟아져서 그냥 트로카데로 역으로 갔다. 역 앞에 언니가 서있어서 반갑게 인사하고 에펠탑 조명 쇼를 보기 위해 샤요 궁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비가 그쳐 조명 쇼가 끝난 뒤 벤치에 앉아 언니가 싸온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언니가 집에서 만들어온 볶음밥과 계란찜, 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에 계속 수다 삼매경에 빠지다 보니 영상 찍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다행히 언니가 이야기해줘서 조명 쇼와 나를 카메라에 담고 샹 드 막스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마트를 찾아야 하는데 내가 위치 감각이 없어 헤매다 간단히 한 잔 하고 헤어질 생각으로 카페에 갔다. 바깥 자리에 앉았는데 추워진 날씨 덕분에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줘 따뜻했다. 언니는 ‘1664’ 맥주를 마셨고 나는 이름은 기억 안 나는 빨간 흑맥주를 마셨다. 안주로 먹을 감자튀김을 주문하고 싶었는데 메뉴판에 없어 언니가 짧은 불어로 웨이터에게 물어보니 가능하다고 해 다행이었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어쨌든 5시간 넘게 에펠탑 조명 쇼를 5번이나 보고 12시가 넘어 집에 왔다. 불이 꺼진 조용한 집 안에 조용히 들어와 방문을 여는데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전부터 뻑뻑해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땐 몸으로 밀어야 열리는데, 팍 하고 밀었더니 건너편 언니 방문도 쾅하고 열려서 놀란 민향 언니가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잠을 깨워 미워한 마음에 방에 가서 죄송하다고 상황을 설명하니 울고 있는 언니가 낮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했다. 눈치를 보며 샤워를 하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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