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20
서머타임이 끝났다. 아침에 눈을 뜨니 7시였다. 어제까진 8시에 눈을 떴었다. 신기하다. 한국이랑 시차가 8시간이 되었다. 배탈이 나 아침부터 화장실에 들락날락거렸고, 임무 수행 후 아침을 먹고 메뉴판 공부를 했다. 11시까지 식당에 일을 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경험이 적은 건 아니지만 언제나 처음은 긴장되고 떨린다. 40분쯤 집에서 나와 식당으로 걸어갔다. 집에서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들어가 인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곧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왔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였고, 내가 23살이라고 하자 어리다고 말했다. 도대체 몇 살인 거지. 언니가 처음 와서 할 일들을 알려주고, 이모의 지시대로 반찬을 세팅하고 창고도 다녀왔다. 바닥을 한 번 쓸고 단체 손님이 오길 기다렸다. 예약 시간이 겹쳐 17명과 28명 손님이 동시에 들이닥칠 뻔했지만 간신히 위기는 넘겼다.
오늘 느낀 점은 한국인은 정말 쓸데없이 빠르다는 거다. 앉자마자 밥을 먹고 반찬을 더 달라며 아우성이고, 10분 만에 식사를 끝내더니 화장실 줄이 길게 늘어섰다. 나는 정신없이 그릇을 치우고 다시 수저를 세팅하고 밥을 놓고 반찬을 놓았다. 곧 28명 손님들이 오시고 자기들끼리 무언가 브리핑을 하고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한숨 돌릴 때쯤 이모께서 집에 가라고 하셨다. 점심도 안 주고 집에 보내다니.
얼떨떨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휴대폰을 보니 1시간 30분이 지나 있었다. 꼬르륵 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집으로 올라가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자녀분들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방에 가 알바 첫날의 생생한 경험담을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다 할아버지가 부르셔서 나갔다. 처음 보는 첫째 아들에게 인사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드렸지만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이는 게 다였다. 정말 무뚝뚝의 극치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소름 끼치도록 닮은 얼굴이었다. 어쨌든 난 방에서 좀 쉬다가 민향 언니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배를 불리고 방에 들어와 외출을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내일부터 일을 해야 하니 쉬기로 결정했다. 이틀이나 밀린 기록을 작성하는데 애경 어머니가 집에 오셨다. 할머니의 쑥뜸을 위해서였다. 아는 얼굴을 만나 반가우셨는지 나에게 정말 서슴없이 말을 거셨는데 조금 불편했다. 뜸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꾸 나에게 요구하기 시작해서 조금 짜증이 났다. 정말 효과가 있기나 한 건지. 너무나도 사이비스럽고 야매스러운 애경 어머니의 말에 신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난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 반쯤 지나서 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니 본인 동네에 오면 연락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일주일 간 매일 집에 오셔서 쑥뜸을 떠주기로 하셨는데 마주치면 조금 불편할 것 같아 내일부터 일을 하고 조금 돌아다니다 집에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는 무한도전을 보며 낄낄대다가 카레로 배를 채우고 불어 공부를 했다. 서머타임 때문인지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오늘 제대로 된 외출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프랑스에서의 두 번째 직장이 꽤 마음에 들어 만족한다. 아마 내일부턴 점심에 나 혼자 일을 할 텐데. 제발 착하고 친절하고 한국말 잘하는 손님들만 오기를 간절히 빈다. 그런데 오늘 일한 1시간 30분의 시급은 챙겨 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