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22
일을 하니 역시 잠이 잘 온다. 8시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간단히 씻고 아침을 먹었다. 화장을 하고 옷까지 다 갈아입은 뒤 뚜왈렛을 기다렸다. 열 시쯤 도착해서 머리까지 감기느라 조금 오래 걸렸다. 임무 수행 후 곧바로 일을 하러 갔다. 하루 만에 이렇게 가기 싫어질 줄이야. 가자마자 쓸고 닦고 청소를 한 뒤 이모를 따라 창고에 내려가 재료를 가져온 뒤 반찬 세팅을 했다. 준비를 끝내고 밥을 주셔서 반찬과 간단하게 먹었다.
식당이라서 밥을 잘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큰 이모는 주방에서 계속 음식을 만들고 작은 이모는 만두를 빚고 계셔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밥을 먹었다. 그냥 집에서 많이 먹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12시쯤 서류를 담당하시는 아저씨가 오셔서 나의 여권과 비자 사진을 보내드렸다. 노동청에 신고가 되는 건가? 아직 나에게 시급이나 월급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으신다. 겨우 이틀이지만.
예약 손님이 두 팀이나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손님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어제랑은 차원이 달랐다. 자리를 안내하고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정신이 없었다. 내가 우왕좌왕하자 작은 이모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잔소리는 일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포장 손님까지 와서 더욱 정신이 없었다. 죄다 프랑스인이라 음식에 대해 질문하고 요구사항을 말하는데 내가 못 알아 들어서 힘들었다. 이모들은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닦달하기만 한다.
손님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테이블을 치우는데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표정도 많이 굳고 한숨도 나왔다. 설거지한 컵과 그릇들을 닦을 때까지 이모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진짜 오랜만에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행히 바로 손님에게 서빙을 해야 해서 꾹 참았다. 그렇게 힘든 4시간이 지나가고 끝날 때가 되자 배도 고팠다. 테이블 세팅을 새로 한 뒤 일을 마무리 지을 때쯤 이모가 얼른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큰 이모는 그래도 수고했다고 말씀이라도 해주셨는데 작은 이모는 진짜 하나부터 열 까지 다 잔소리다. 아 화나.
내가 잘못한 거에 대해서만 뭐라고 하면 억울하지도 않지. 본인이 가르쳐주지도 않은 것에 대해 내가 눈치껏 잘하기를 바란다. 하루 만에 반감이 쌓였다. 집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심지어 미화 언니에게까지 하소연을 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왔다. 지금까지 파리에서 너무 편하게 살아와서 그런가.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생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었다. 한참 욕을 하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모가 뭐라고 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해낼 거다. 오히려 더 자극이 되었다. 하나를 가르쳐주고 열을 바라다니. 완벽하게 해 주겠어. 열받아. (본 헤이터 민호 가사랑 비슷한 기분이다. ‘일도 많은 내게 자꾸 열을 바라면, 완벽하게 해 주지 자 열받아요.’) 그렇게 오후 시간은 쉬는데 집중했다. 토요일 날 있을 퀴즈대회 예상문제를 잠깐 열어보았는데 광복 이후 근현대사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역사. 1등을 글렀다.
저녁 뚜왈렛이 늦게 와서 영화 타짜 2를 보다가 7시쯤 임무 수행을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거나 다름없어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진짜 살이 저절로 빠지겠네. 힘들고 스트레스받아서. 밥을 먹고 할아버지랑 물을 사러 마트에 갔다. 간 김에 내가 마실 맥주도 두 캔 사 왔다. 데스파라도 레드와 라임! 이제 1일 1 맥주를 해야겠다. 일 할 때만. 오늘은 조금 늦어서 참고 내일 맛있고 시원한 맥주를 마셔야지.
다행히 일을 딱 4시간밖에 안 해서 그래도 참을 만할 것 같다. 이틀 만에 이 정도 스트레스라면 나중에 정말 힘들어서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래도 내가 더 빠릿빠릿하게 잘하면 욕도 안 먹겠지. 아 짜증 난다. 진짜. 그래도 철판 깔고 웃으면서 해야지. 돈 벌기가 역시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몸과 마음으로 체감한 날이었다. 얼른 자야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