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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Nov 25. 2022

난 한다면 하는 사람

파리의 안나 123

잠을 너무 잘 잤다. 그래도 피곤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할머니 아침을 챙겨드리고 화장을 하다가 뚜왈렛이 와서 임무 수행을 마쳤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일 끝나고 좀 돌아다니려고 가방까지 챙겨서 나갔다. 쓰레기를 버리고 식당으로 가는 길. 오늘은 진짜 잘해야지.


식당에 가니 작은 이모 혼자셨다. 큰 이모는 집에 일이 있어 늦게 오신다고 한다. 청소를 하고 반찬을 담고 맥주를 냉장고에 넣어둔 뒤 손님을 기다렸다. 어제 끝날 때 작은 이모가 알려준 방법대로 메모지에 구역을 나누고 표시를 해 두었다. 첫 손님은 여자 혼자였다. 레드와인 한 잔을 주문했는데 처음엔 ‘vin’을 못 알아 들었다. 다음 손님도 여자 혼자였다. 오늘은 혼자 오는 손님이 많았다. 메모지 덕분에 주문도 잘 받고 실수도 안 했다.

 

5명 손님 테이블에 갈비찜 대신에 돌솥 비빔밥이 나가는 사고가 있었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 작은 이모 실수였다. 나는 제대로 적어 드렸는데 이모가 잘 못 보신 거였다. 다행히 손님이 이해를 해주셨다. 하도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땀이 나고 더웠다. 2시쯤 모든 손님이 나가고 테이블을 치운 뒤 설거지를 했다. 컵을 닦으며 이모에게 일부러 “오늘은 저 잘했죠?”하고 칭찬을 강요했다. 다행히 작은 이모는 하루 만에 적응을 다 한 것 같다며 한 달 정도 지나면 아주 날아다니겠다고 하셨다. 뿌듯했다. 거 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기분 좋게 일을 끝내고 2시 40분쯤 일찍 퇴근했다. 기분 좋게 89번 버스를 타고 뤽상부르 공원에 갔다.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데 정말 예쁘더라. 사진을 찍고 책을 읽었다. 그런데 해가 없어서 한 삼십 분쯤 지나자 으슬으슬했다. 추위에 못 이겨 버스를 타러 갔다. 다시 89번 버스를 타면 이상한 동네로 가니까 27번 버스를 타고 생 미셸에 내렸다. 노트르담 성당을 멀리서 본 뒤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빗방울이 조금씩 내렸다. 집에 도착해 할머니에게 물을 가져다 드리고 쉬었다.


배가 고파 삶은 밤을 좀 먹고 인터넷을 하다가 ‘파리 한국 영화제’를 검색했다. 어제부터 11월 4일까지 샹젤리제 거리의 한 영화관에서 열리는 축제다. 나는 명량이 보고 싶었다. 사이트에 들어가니 미리 예매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불어로 된 사이트에서 혼자 결제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할아버지께 부탁할 요량으로 임무 수행 후 돈을 찾으러 나갔다. 집 앞 은행 ATM에 카드를 넣고 400유로를 출금하려는데 300유로까지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300유로를 찾고, 잔돈을 만들기 위해 슈퍼에 가서 하리보 젤리를 샀다.


집에 와 할아버지께 예매를 부탁드리고 함께 진행하는데 사이트에 회원가입까지 해야 하더라. 한 번 튕겨서 정말 귀찮았지만 영화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다시 도전했다. 내 카드로 무사히 예매를 마치고(잔돈을 만들지 않아도 됐었다.) 예약 번호를 받았다. 웃긴 건 영화관에 가 예약 번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프낙에 가 티켓을 찾아와야 했다. 아 진짜 더럽게 귀찮게 구네.


결국 저녁을 먹고 할아버지와 함께 몽파르나스 근처 프낙에 갔다. 그래도 꽤 간지 나는 티켓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7유로. 내일모레 저녁 6시 영화다. 기대된다. 그나저나 프랑스에 와 할아버지를 못 만났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일자리도 구하고, 핸드폰도 개통하고, 영화표 예매와 같은 소소한 일들까지. 할아버지가 있어 든든하다. 참 감사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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