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24
새벽에 아랫배가 묵직하게 당겨 눈을 떴다. 몸이 차가웠다. 혹시 생리를 시작했나 싶어 속옷을 확인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불을 다시 덮고 잠을 청했다. 몇 시간 뒤 알람을 듣고 일어났다. 여전히 배가 아팠다. 혹시 배탈이 났나 싶어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끝내고 아침을 먹었다. 할머니께 오트밀 죽을 드리는데 갑자기 신호가 왔다. 생리다. 얼른 화장실에 가 생리대를 착용했다. 다행이다. 내일모레 걷기 대회 날이 예정일이라 걱정했는데 이틀 일찍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 약을 하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뚜왈렛을 도운 뒤 일하러 갈 준비를 했다. 역시나 가기 싫군. 40분에 집에서 나와 식당으로 걸어갔다. 날씨가 좋았다. 이모들께 인사를 드리고 청소를 했다. 쓸고 닦은 뒤 병을 내다 버리러 나갔는데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에비앙과 와인 병은 따로 수거를 해 가는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분리수거 통에 넣어 버린 것이었다. 큰 이모의 눈빛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다행히 크게 뭐라고 하진 않으셨다. 휴. 시작하자마자 이게 뭐람. 이제 절대 실수하는 일은 없을 거다.
테이블과 반찬 세팅을 마치고 작은 이모를 도와 무를 손질했다. 혹시나 손님이 올까 봐 메모지를 준비해두고 계속 문을 주시했다. 첫 손님은 여자 세 명. 메모지를 사용하니 계속해서 들어오는 손님들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바쁜 와중에 들어와 자리를 안내하고 반찬을 세팅하는 일은 조금 벅차다. 밥도 못 먹고 일을 하다 보니 금방 지쳤다. 하지만 쉴 시간도 없이 홀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역시나 2시쯤 손님들이 대부분 빠지고 작은 이모가 컵라면을 끓여 주셨다. 아까 퍼놓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밥과 함께 먹었다. 오늘은 배부르게 집에 갈 수 있겠군.
이모들은 이 정도 페이스면 금방 적응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월급 명세서가 나왔으니 은행 계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월급은 수표로 주는 것 같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갈 때 계좌를 닫는 것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수표 입금을 위해 내 계좌를 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손님들이 모두 빠지고 모든 세팅을 완벽히 끝낸 뒤 핸들링을 하고 일을 끝냈다. 2시 55분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 날씨가 정말 너무 좋았다. 집에 도착해 할아버지께 은행 계좌를 열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곧바로 집 앞 ‘소시에테 제네할’에 가자고 하셨다. 원래 계좌를 열기 위해서는 헝데부를 잡아야 하는데 운이 좋게 지점장과 바로 만들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거주 증명서와 전기세 고지서를 가지러 잠깐 집에 가신 동안 지점장과 단 둘이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프헤농’이 무어냐고 물었고, 나는 ‘pyo’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프헤농은 이름이고 농이 성이었다. 왜 난 반대로 알고 있던 거지.
결국 나중에 서류를 다시 뽑아야 했고 내가 죄송하다고 말하자 그는 ‘괜찮아 종이는 많으니까’라고 해주었다. 프랑스는 카드 디자인도 직접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에펠탑이 그려져 있는 카드를 가지고 싶었는데 그건 유료였다. 무료 디자인 중에 밤에 빛이 난다는 미러볼이 박혀 있는 카드를 골랐다. 서류에 사인을 하고 무사히 계좌를 열었다. 일주일 뒤에 집으로 우편이 날아올 것이라 했다. 그 우편을 가지고 은행에 가면 내 카드와 수표책을 주는 시스템이었다. 참 귀찮게 군다. 어쨌든 할아버지 덕분에 계좌도 손쉽게 열고 기분이 좋았다.
내일모레 집세를 내기 위해 100유로를 추가 인출하고 집에 돌아왔다. 가계부를 작성하고 쉬다가 영화 ‘제보자’를 보았다. 정말 지루하게도 만들었다. 오후 뚜왈렛이 늦게 와 저녁을 먼저 먹고, 7시 반쯤 임무 수행을 마쳤다.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와 통일 퀴즈 대회 예상문제를 훑어보았다. 50번까지 봤는데 아는 문제도 있었고 전혀 생소한 문제도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등은 글렀다. 그래도 내일 벼락치기해야지.
인터넷을 뒤적이다 워홀 홈페이지에서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10월 23일 날짜로 한-이 즉 이탈리아와의 워홀 협정이 발효됐다는 소식이었다. 한 번 더 도전해봐? 한국에 들어간 뒤 졸업 후 (그럴 리 없겠지만) 여유가 생긴다면 생각해 봐야겠다. 재밌을 것 같다. 아 근데 지금 너무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