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26
걷기 대회 날. 여섯 시 50분에 일어났다. 졸리다. 가기 싫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화장실을 가서 일을 본 뒤 씻고 준비를 했다. 연하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침으로 먹을 사과를 깎아 챙겼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7시 30분쯤 나갔다. 아침 공기가 조금 쌀쌀했다. 지하철을 타고 앙발리드 역으로 갔는데 딱 8시였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버스도, 사람도! 순간 멘붕이 와서 혼자 광장을 쭉 걷다가 한 가족을 만났다. 아주머니는 한국 분이셨고 남편 분은 프랑스 사람이었다. 아들 두 명은 혼혈아였다.
알고 보니 모임 장소는 반대편 광장이었다. 다행히 그분들이 차를 태워주셔서 늦지 않게 도착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태극기와 물, 우비를 받은 뒤 버스 승차를 기다렸다. 대략적인 분위기를 보니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교회 측 주최라 서로 아는 사이가 많았고 대부분 가족 단위였다. 인사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나는 혼자 온 사람을 찾아 눈을 굴렸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솔로는 남자분 한 명. 나이도 많아 보이고 말을 걸기가 꺼려졌다. 그냥 혼자 걷지 뭐, 비행기 표나 따 가야겠다, 공부나 해야지 싶었다.
제일 사람이 적은 3호차에 올라탔다. 끈과 몽쉘을 나눠주기에 가방에 리본을 묶고 몽쉘을 먹었다. 핸드폰으로 다운로드하여 온 예상문제를 한 번 쭉 읽고 조금 눈을 붙였다. 한 시간 정도 가니 파리와는 다른 시골 마을 풍경이 보였다. 도착하여 인솔을 기다리다가 혼자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삼삼오오 모여 신나 보이는 사람들. 그 속에 혼자 있는 나. 근데 전혀 외롭지 않았다. 그래도 걷다 보면 심심할 것 같아 아까 본 그 아저씨에게 말을 걸까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화장실에 들를까 싶어 카페에 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나왔다.
근처 교회 사진을 찍고 다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갔는데 혼자 서 있는 여성분이 보였다. “저기요, 혼자 오셨어요?”하고 말을 거니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반갑게 “저랑 같이 걸어요!”하고 대시했다. 87년생 소아영 언니는 암 박사 공부 중이라고 했다. 암이라니. 정말 생소한 분야다. 서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주최 측의 안내에 따라 국기에 대한 경례와 묵념을 했다. 타지에서 애국가도 처음으로 불렀다.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걷기가 시작되었다. 산길이나 들길을 걸을 줄 알았는데 마을 옆 아스팔트 길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풍경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날씨도 정말 좋았다. 더울 지경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배가 고팠다.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같이 걷던 아영 언니가 길이 안 들은 신발을 신고 와서 발뒤꿈치가 까져서 응급차를 기다리느라 조금 지체되었다. 그 김에 한숨 돌릴 수 있어 좋았다. 밴드를 붙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걷던 사람들을 놓쳐 길을 잃을 뻔했지만 함께 가던 교회 목사님 덕분에 무사히 찾아갈 수 있었다. 언니와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도착에 얼떨떨했다. 종이를 나눠주고 소원을 적어 비행기를 접으라고 했다. 추첨을 통해 상품도 나눠준단다. 일부러 잘 보이는 빨간색 종이를 골랐다.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도착하고 간단한 일정 안내를 들은 뒤 드디어 점심을 먹었다.
분명 신문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다고 봤던 것 같은데 메뉴는 육개장이었다. 그래도 안 짜고 맛있게 잘 먹었다. 식사 후 수양원 마당에 모여 앉아 작은 음악 공연을 보고 통일 퀴즈대회가 시작되었다. 1등 상품인 비행기 티켓이 목표였지만 허무하게도 세 번째 문제에서 탈락했다. 뽀로로가 남북 합작 만화란다. 어이가 없었다. 언니와 나는 패자 부활전을 노렸지만 북한 수교 문제로 또 탈락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비행기 추첨을 노렸다. 그런데 그 많은 상품 중에 단 하나도 걸리지 않았다. 운도 참 더럽게 없다.
기운 빠지는 시간이 지나고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수건 한 장을 받아 챙겼다. 행사 장소를 정리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이번엔 아영 언니와 함께 탔다. 언니의 이런저런 질문에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 보니 금방 파리에 도착했다. 그냥 헤어지기는 아쉬워 번호를 받았다. 앙발리드 앞에서 인사를 하고 나는 참방 식당으로 걸어갔다. 저녁을 먹으러 오라던 이모의 말을 기억하고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도착하니 손님이 있었다. 이모들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왠지 앉아만 있기가 미안하여 서빙을 도왔다. 손님들은 나에게 혹시 딸이냐, 유학생이냐, 여행 왔는데 왜 찌개를 나르고 있냐며 질문을 해댔다.
이모들이 만든 갈비와 함께 밥을 먹었다. 정말 꿀맛이었는데 손님들이 계셔서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든든히 배를 채우고 테이블을 정리한 뒤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설거지까지 하고 오려고 했는데 이모들이 오래 걸어 피곤하겠다며 얼른 가서 쉬라고 해주셨다. 집에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곧 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도착하니 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할아버지께 오늘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곧바로 샤워를 했다. 바로 자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 오후 임무 수행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녁까지 빼먹을 순 없었다. 밀린 기록을 작성하고 시간을 보내다 뚜왈렛을 마치고 이렇게 글을 마무리 짓고 있다. 정말 피곤하다. 꿀잠 자겠다.